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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팬더곰238
귀여운팬더곰23823.05.28

이집트 역사에서 중국의 제갈량이나 사마의와 같은 지략가가 있었나요?

이집트의 경우 중국보다는 정복전쟁이 그렇게 활발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이집트에서도 중국의 제갈량이나 사마의와 비견될만큼 뛰어난 지략가가 존재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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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의 제갈량과 사마의와 비견될만한 지략가가 이집트에 존재하다면 누구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찾기는 어려운것 같습니다.

    이집트의 경우 매우 강력한 왕권체제로 역사가 파라오를 기반으로 기록되고 쓰여진 경향이 있어 그 뒤에 있는 책략가에 대한 기록을 알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365일을 12개월로 나누어 달력을 만들어 나일강의 범람을 예측하였다던지 시계를 발명하고 피라미드 건축물을 지은것을 본다면 고대 이집트인들도 매우 똑똑했고 지략가들이 분명 존재했으리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추측해보건데 파라오 다음으로 강한 관료였던 총독집행관과 대제사장들중에 뛰어난 지략가가 있었다고 볼수 있으며 그중 당시 매우 유능했던 임호텝이 이집트의 총리로서 지략가였으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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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클레오파트라 아닐까요

    파스칼은 "나로서는 무엇인지 모르는 것 그 하찮은 것이 모든 땅덩어리를, 황후들을, 모든 군대를, 온 세계를 흔들어 움직이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 그것이 조금만 낮았더라면, 지구의 모든 표면은 변했을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 이처럼 클레오파트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성의 아름다움의 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늘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는 고대 이집트였고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2천년도 전인 기원전의 사람인데도 여전히 클레오파트라는 미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클레오파트라는 미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것과 함께 클레오파트라는 '뜨거운 여인'이라기보다는 학자풍이었으며 파피루스에 기록된 역사서를 보면 그녀는 모국어인 이집트어는 물론 에티오피아어 터키어 아라비아어 트로글듀크어 시리아어 메데어 파르티아어 그리고 휠씬 뒷날 예수가 일상적으로 사용한 유대어에 이르기까지 무려 10개 국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미와 더불어 훌륭한 화술과 지적인 모습으로 그녀가 로마의 영웅인 시저나 안토니우스를 유혹하지 않았다면 고대사가 달라졌을 것이란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당시의 미의 기준이 오늘날과 다르긴 하겠지만 '플루타크 영웅전'에는 '사람들이 말하는 바로는 클레오파트라의 미가 다른 사람과 비교가 안될 만큼 놀라운 것은 아니었고,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도 아니었다'고 서술되어 있다고 한다. 그 당시 클레오파트라가 미인으로 주목받은 이유는 외모뿐만이 아니라 출중한 정치능력이나 여장부다운 배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째, 총명한 여왕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69년, 당시 이집트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아버지의 영광'이란 뜻이다.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사후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고 함께 왕위에 오른다. 이집트 왕실은 라지드법으로 근친혼을 법으로 정해 왕실의 피가 다른 피와 섞이는 것을 막고 있었다. 즉위 당시 클레오파트라가 18세.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10세였다. 당연히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정치를 모두 관장하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어려서부터 방대한 양의 독서로 당대 누구도 따를 자 없는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다 클레오파트라는 천부적인 언어 능력을 보여 무역도시 알렉산드리아를 통교하던 수많은 나라의 외국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다. 이웃하고 있는 로마가 급성장 하여 이집트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클레오파트라. 그녀는 강성한 로마에 맞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눈물겨운 외교술과 지략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둘째, 독약같은 아름다움의 상징인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BC 69~BC 30)에 대한 고정 관념은 그녀가 로마의 위대한 두 명의 영웅,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사랑하였고 그녀와 사랑하던 바로 그 지점쯤에서 두 명의 영웅 모두 비극적 종말을 맞이했다는 데서 출발한다. 클레오파트라라는 여성의 삶 자체보다는 그녀가 만났던 남자들의 인생에 의해 그녀에 대한 이미지가 고정된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당대의 영웅을 차례로 홀리고 비극적인 운명에 몰아넣을 수 있었을까 하는 호기심에서부터 그녀의 요부로서의 이미지가 확고해진다. 그러나 사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여왕으로서 자신의 나라를 지키는 데 한평생을 고심하여 보낸 정치가이자 지략가였다. 물론 그녀 인생에서 만난 두 명의 로마의 영웅들은 그녀에게 매우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그녀 또한 그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기도 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 이 총명한 이집트의 여왕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오로지 자신의 나라뿐이었다.

    셋째,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외부적으로 가까스로 이집트를 지켜내 가고 있던 클레오파트라에게 내부에서부터 위기가 커가기 시작했다. 남편이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성장하면서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클레오파트라에게 반기를 든 것이다. 잠시 시리아쪽으로 몸을 피한 클레오파트라는 그곳에서 더 큰 위협을 만나게 된다. 로마의 장군 시저가 이집트를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내부적으로 정치적 궁지에 몰리고 외부적으로는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지혜와 미모를 이용해 난국을 타개해 갈 것을 결심한다. 시저는 당시 로마를 지배한 보수적인 전제 군주들을 섬뜩하게 하기도 하고 그는 시민들의 법적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투쟁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권력의 유혹에 말려들어 자신의 이미지를 '시저신' '삶을 위한 독재자'로서 동전에까지 새기게 했다.

    시저를 찾아간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독립을 보장받는 대신에 시저의 여인이 되었다 줄리우스 시저의 정부로서 클레오파트라는 이국의 뇌살적인 요부라는 평판을 얻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무찌를 군대를 얻는다. 결과적으로 클레오파트라는 시저의 군대로 내부의 적들을 일소하고 시저로부터 이집트의 안전과 독립을 보장 받게 된다.

    넷째, 안토니우스 와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가 여왕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해야 한다는 시저의 결정을 두려워한 알렉산드리아의 고문관들은 그를 죽일 결심을 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암살계획을 한다. 시저와의 사랑은 그가 부르투스에게 암살당함으로써 끝난다. 클레오파트라는 시저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돌아온다. 이제 시저에게 보장받았던 이집트의 독립은 다시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시저 사후에 로마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양분체제에 놓이게 되었다. 어느 쪽이든 한쪽이 이겨야만 끝날 갈등의 시기였다. 두 세력의 다툼을 지켜보던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나라 이집트를 위해 한쪽 편을 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도 이기는 쪽의 편을 들고 그 대신 이집트의 독립을 보장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당시에는 옥타비아누스보다 안토니우스가 더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기꺼이 안토니우스를 이집트로 불러들이고 그를 유혹한다. 처음에는 클레오파트라를 멀리 하던 안토니우스도 그녀의 매력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사랑에 빠진다.

    안토니우스는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그러나

    쾌락을 또한 억제할 수 없는 몸집 큰 어린애였다.

    -조제프 에른스트 르낭:

    프랑스의철학자이자 역사가

    처음에는 나라를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안토니우스의 남자다움과 용맹에 끌린 클레오파트라도 곧 이어 사랑에 빠지고 만다. 두 사람은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그저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라 안토니우스를, 성적 매력이 가득 풍기는 이국의 여왕에게 하릴 없이 유혹되어 추종만 하는 인간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합리적인 정치적 관심을 추구하지 않았다면 사랑의 열정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 협력함으로써 얻는 것이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녀의 정적들에 대항할 수 있는 로마군의 지원을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의 결전과 파르티아와의 전쟁에 소요될 비용의 충당을 이집트의 부(富)에서 구했다

    -프리츠 하이헬 하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만남은 장차 로마 제국의 역사, 더 나아가서는 서구 세계의 역사에 오래도록 영향을 미치게끔 운명지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만남이 갖는 역사적 중요성은 오히려 그들의 사랑 이야기로 가리어지기 일수였다. 사실 이 사건은 두 남녀의 열렬한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섯째, 악티움 해전의 패배와 자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로마를 둔 마지막 한판 승부는 악티움 해전에서 결정이 났다.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클레오파트라와 이집트의 운명까지 쥐고 있던 악티움 해전은 안토니우스의 비참한 패배로 끝나고 만다. 악티움에서 후퇴하여 이집트까지 쫓겨 온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품에 안겨 최후를 맞이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진정으로 사랑하였던 남자의 죽음을 목도하고 모든 희망의 끈을 놓아 버린다. 가까스로 지켜왔던 이집트의 독립도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한 클레오파트라는 과감히 자살을 택한다. 그것은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개선행렬에 포로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모욕을 당하지 않을 마지막 방법이었다. 아름다운 옷으로 성장하고 온갖 보석으로 치장한 다음 꽃 속에 누운 클레오파트라는 일부러 놓아둔 독뱀에 가슴을 물려 비장한 죽음을 맞이한다. 클레오파트라 이후 이집트는 로마의 한 속주로 전락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아름다움이 전부인 여성은 아니었다. 엄청난 노력가였으며 뛰어난 정치가였고 개인보다는 나라를 위해 자신을 던질 줄 아는 호쾌한 위정자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진정한 사랑을 끝내 죽음으로 완성한 지고지순한 여인이기도 하였다.

    도대체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어떤 강점이 있기에 여기에 이른 것일까?

    그녀의 강점을 나열해 본다면 첫째로 그녀는 야망의 스케일이 컸다. 그녀가 후반 생애에서 전심을 다해 추구한 것은 아들 카이사리온의 세계 지배라고 할 수 있다. 카이사르의 적법한 후계자로 인정받아 이집트뿐만 아니라 로마까지 지배하는 꿈, 실제로 이 꿈은 악티움 해전 직전까지 현실화될 가능성을 안은 채 전진해나간다.

    둘째, 찬스에 강했다.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 배팅한다. 로마의 실력자 카이사르와 인맥을 구축하고 파라오 재등극을 위한 계기를 잡으려 실제 그는 결정적 장면을 연출한다. 잠재적 암살자나 밀고자들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양탄자로 몸을 만 채 그야말로 영화처럼 카이사르의 숙소에 잠입하는 것이다.

    셋째, 무엇보다 총력전의 화신이다.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무기다. 성적 매력이라든가 사랑도 무기로 동원된다. 또 남성은 전쟁에서 이겨 전리품만을 갖지만, 여성은 자식을 낳음으로써 모든 자의 미래를 장악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활용했다.

    넷째, 외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깊이 깨달았다. 로마를 잡으면 승리한다는 것을 깨닫고, 로마를 통해 완전한 승리를 꿈꿨다. 10개 국어를 구사하는 외국어 능력과 해박한 교양도 모두 이런 외교전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다섯째, 이집트의 마음을 읽었다. 그리스의 마케도니아계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인간들은 사실상 이집트어를 배우지 않았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이 언어를 배웠다. 나아가 어느 왕족보다도 알렉산드리아 왕궁 밖에 사는 800만에 이르는 비그리스계 이집트인들을 이해하고 싶어 했다. 바로 이것이 클레오파트라를 영원히 사는 길로 이끌게 된다.

    여섯째, 통치능력이 뛰어났다. 이집트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금화가치를 3분의 1로 격하해 수출 증대를 도모하는가 하면, 의무공채를 발행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경제도 잘 알았던 셈이다.

    클레오파트라를 역사가들은 이렇게 묘사했다

    나이도 그녀를 시들게 할 수는 없었다.

    비록 의상이 진부할지라도.

    다른 여인들은 충족된 욕망에 쉽게 만족하나

    그녀의 무한한 변화는 그녀를 가장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곳에서도

    항상 그녀를 허기지게 만든다.

    -세익스피어

    플라톤은 네가지의 아첨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녀는 1천 가지의 아첨을 지녔다.

    -플루타르크

    만약 그녀가 성공했더라면 그리스 로마의 군주제가 수립되었을 것이며,

    로마에 대한 헬레니즘의 영향력은 확대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로마가 아니라 알렉산드리아가 당연히 이 제국의 수도가 되었을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지금까지도 역사상 기다란 그림자를 던져 주고 있다.

    -브래드 퍼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는 말은 그녀의 고혹적인 미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자존심'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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