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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탈한하늘소43
소탈한하늘소4323.04.30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일어나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가요?

고려중기에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일어났잖아요, 근데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일어나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묘청의 난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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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30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내외적인 혼란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서경으로 천도하자는 움직임이 인종대 중반에 새롭게 등장한 정치세력에 의해 상당 기간 주장되면서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이를 흔히 ‘서경천도운동’이라고 부른다. 물론 서경은 고려 태조대 이래로 중요한 지역으로 여겨져 왔던 곳이었다. 3대 국왕인 정종(定宗)도 서경으로 천도를 준비했던 적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인종대의 천도 관련 사건만을 다루도록 하겠다.

    이자겸과 척준경의 일파가 제거된 후 김부의(金富儀)·김부식(金富軾) 형제와 이수, 이지저 부자, 그리고 새로 외척이 된 임원애(任元敱) 계열이 크게 부상하였다. 한편 서경 출신으로, 권신이던 척준경을 탄핵하여 그의 실각을 이끌어낸 정지상 역시 중요한 인물로 새롭게 떠올랐다. 정지상은 동향의 승려 묘청(妙淸)과 일관(日官) 백수한(白壽翰) 등을 천거하여 왕의 신임을 받을 기회를 마련해주었고, 근신인 김안(金安), 문공인(文公仁) 등과도 정치적으로 협력 관계를 만들고 있었다. 이처럼 당시 크게 두 계열의 정치세력이 존재하는 가운데, 이중 정지상, 묘청 등이 중심이 되어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였다.

    인종은 1127년(인종 5) 3월에 서경에 행차하여 관료조직의 감축, 불필요한 세금의 감면, 농사의 장려, 민생 안정, 질병 구제, 빈민 구제 등 15조에 이르는 유신 개혁안을 선포하였다.

    묘청 일파는 고려의 도읍을 서경으로 옮기자는 주장을 폈다. 이들은 1128년(인종 6) 8월에 정지상이 김안과 함께 일을 도모하면서 ‘우리가 만약 주상을 받들고 서경으로 옮겨서 상경(上京)으로 삼으면 당연히 중흥공신(中興功臣)이 되어 (우리) 일신의 부귀뿐만 아니라 자손들까지도 무궁한 복을 누릴 것이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수도를 서경으로 옮겨서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이러한 권력 갈등은 묘청 등을 서경파로 설정하고, 개경의 기존 관료들을 개경파로 설정하여 두 세력 간의 갈등이었던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서경천도파는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당시 유행하고 있던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과 칭제건원(稱帝建元),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 등을 전면에 내세웠다. 묘청과 백수한의 음양비술을 믿었던 정지상이 ‘상경(개성)은 기업(基業)이 이미 다하여서 궁궐이 모두 불에 타 남은 것이 없으나, 서경에는 왕기(王氣)가 있으니 마땅히 옮겨서 상경으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말하거나, 묘청 등이, “저희들이 보기에 서경(西京) 임원역(林原驛)의 지세(地勢)는 음양가(陰陽家)들이 말하는 대화세(大華勢)에 해당합니다. 만약 궁궐을 세워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신다면 천하를 아우를 수 있어 금나라가 예물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해올 것이며 36국(國)이 모두 신하가 되어 굴복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서경으로 천도만 한다면 그 기운을 받아 고려의 국운이 다시 융성해지고, 대외관계를 비롯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인종도 설득되어서 마침내 1128년(인종 6)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인종은 묘청의 말대로 임원역 지역에 대화궁을 짓고, 1131년(인종 9)에는 그 안에 팔성당을 두는 등의 각종 시설을 갖추고 여러 차례 행차하였다. 다만 인종은 칭제건원과 금국정벌에 대한 건의는 수용하지 않았으나, 이 건의는 지속되었다.

    서경천도운동의 영향 및 평가

    반란의 진압 이후 정국은 토벌을 성공적으로 이끈 김부식 등이 주도하였다. 이후 인종대는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하게 예제, 과거제 등의 정비를 통해 국가지배체제를 안정시키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고려 초 이래로 중시되었던 서경의 위상은 크게 하락하고 말았다.

    근대로 오면서 칭제건원과 금국정벌론을 앞세운 묘청 등의 서경천도운동에 대해 금나라에 대한 적개심의 표현이라거나 자주 독립정신의 발로였다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하며, 한편에서는 당시의 정세상 금국정벌은 도저히 불가능한 무리한 주장이면서도 그것이 국력 배양을 통한 것이 아니라 단지 지리도참설에 의거한 주장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왕권을 강화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측과 왕권을 견제하려는 문벌 세력간의 갈등과 대립의 결과로 이해하기도 한다.

    출처: 우리역사넷 서경천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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