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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2

우리역사에서 제주도의 역사를 배울 때 탐라국이 등장하고 기록이 된 것은 언제부터 였는지 궁금합니다

우리역사에서 제주도의 역사를 배울 때 탐라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역사에 등장하고 기록이 된 것은 언제부터 였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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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탐모라국(耽牟羅國)·섭라(涉羅)·담라(儋羅)·탁라(乇羅)라고도 표기되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및 조선 초기까지 오랫동안 불려졌던 칭호이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제주도 3성(姓) 시조신의 하나인 고을나(高乙那)의 15세손 고후(高厚)·고청(高淸)과 그 아우 등 3형제가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이르렀는데, 이 때는 신라 성시(盛時)였다. 3형제가 들어와 조공하자 신라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맏아들에게는 성주(星主), 둘째에게는 왕자(王子), 막내에게는 도내(都內)라는 작호를 주고 국호를 탐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서 탐라국이라는 명칭은 유래했으며, 실제로는 ‘섬나라’라는 뜻이다. 성립연대는 신라 성시라는 시기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이므로 문무왕 때로 추측된다. 그 이전의 사회는 3성씨족의 공동연맹체적인 체제로 보이며, 신라의 삼국통일기에 이르러 3성 가운데 세력이 강성한 고씨(高氏) 씨족이 군장(君長)으로 군림해 국주(國主)가 된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탐라국 [耽羅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누리함
    누리함23.05.22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탐모라국(耽牟羅國)·섭라(涉羅)·담라(儋羅)·탁라(乇羅)라고도 표기되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및 조선 초기까지 오랫동안 불려졌던 칭호입니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제주도 3성(姓) 시조신의 하나인 고을나(高乙那)의 15세손 고후(高厚)·고청(高淸)과 그 아우 등 3형제가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이르렀는데, 이 때는 신라 성시(盛時)였습니다. 3형제가 들어와 조공하자 신라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맏아들에게는 성주(星主), 둘째에게는 왕자(王子), 막내에게는 도내(都內)라는 작호를 주고 국호를 탐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에서 탐라국이라는 명칭은 유래했으며, 실제로는 ‘섬나라’라는 뜻입니다. 성립연대는 신라 성시라는 시기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이므로 문무왕 때로 추측됩니다. 그 이전의 사회는 3성씨족의 공동연맹체적인 체제로 보이며, 신라의 삼국통일기에 이르러 3성 가운데 세력이 강성한 고씨(高氏) 씨족이 군장(君長)으로 군림해 국주(國主)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설화에 의하면, 처음에는 고을나·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 등 3성의 시조가 모흥혈(毛興穴, 三姓穴)에서 나타나 그 자손들이 나라를 이루고 살았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사람은 키가 조금 작고 언어는 한(韓)과 같지 않으며, 개나 돼지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소와 돼지를 잘 기르며 또 노루와 사슴이 많으며, 풍속은 질박하고 비루하며, 여름에는 초옥(草屋)에 살고 겨울에는 굴실(窟室)에 산다고 합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한조(韓條)에는 “주호(州胡)"라고 지칭하면서 배를 타고 중국과 한(韓)에 내왕하며 교역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최근에도 오수전(五銖錢)·화천(貨泉) 등의 중국화폐가 발굴되었습니다.


    대외관계는 제일 먼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백제와 밀접해 476년(문주왕 2) 4월에 사신을 파견해 방물(方物, 토산물)을 바치고 그 사신은 좌평(佐平)의 관등을 받았습니다. 498년(동성왕 20) 8월에는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다가 백제동성왕이 친히 정벌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고 공부를 바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고구려와는 가옥(珂玉)을 수출하는 등 교역을 했으나 백제에 복속된 이후로는 교섭이 두절되었습니다. 한편, 신라와는 662년(문무왕 2) 2월에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함으로써 이때부터 신라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뒤에 일본과 가깝게 지내다가 678년 2월에 신라 사신의 경략을 받았습니다. 이 뒤로는 신라와 활발하게 교섭하였습니다.


    한편, 중국 당나라와는 661년 8월에 왕 유리도라(儒李都羅)가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또, 일본과는 661년 당나라에서 귀국하던 일본사신의 배가 풍랑을 만나 탐라국에 대피했다가 귀국할 때,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 9명이 이들을 따라 일본에 간 일이 있은 뒤로 매우 교섭이 활발해 많은 왕자와 좌평이 일본을 다녀왔습니다. 또 680년 9월과 686년 8월에는 일본에서 사신이 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신라 말기에는 점차 복속관계에서 벗어나, 신진세력인 고려에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여 925년(태조 8) 11월 사신을 파견해 방물을 바쳤습니다. 938년 12월에는 탐라국주 고자견(高自堅)이 태자 말로(末老)를 파견해 입조하고, 고려로부터 신라의 예에 따라 성주·왕자의 작위를 받아 고려의 번국(蕃國)으로서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 후 1105년(숙종 10)고려의 지방행정구획인 1개의 군(郡)으로 개편되면서 반독립적인 체제는 사라졌습니다.


    1153년(의종 7)탐라군은 다시 격하되어 탐라현이 된 뒤로는 고려조정으로부터 파견된 현령이 탐라의 행정업무를 관장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탐라국 체제는 없어지고, 성주와 왕자의 관직만이 남아 상징적 존재로 유지되었습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4년(태종 4) 5월에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되어 존속하다가, 1445년(세종 27) 6월에 이것마저 폐지되어 이 때부터 탐라의 귀족계급은 완전히 평민화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제주도 3성 시조신의 하나인 고을나의 15세 후손 고후, 고청과 그 아우 등 3형제가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탐진에 이르렀는데 이 때는 신라 성시였고 3형제가 들어와 조공하자 신라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맏아들에게 성주, 둘째에게 왕자, 막내에게 도내라는 작호를 주고 국호를 탐라라고 했다고 전해집니다.


  •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주도는 오랜 기간 한반도와 동떨어져 진행되어 왔으며

    탐라는 제주도의 옛 명칭이며, 그곳에 존재했던 국가의 이름이었습니다.

    약 12세기까지 독립 상태를 유지했으며,

    조선 초기에 본국에 완전히 편입되어 구한말까지 계속해서 탐라로 부르다가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제주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