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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드가자
자 드가자21.05.29

영화하면 충무로인데 왜 그런가요?

충무로는 영화와 관련된 것으로 유명한데, 실제로 충무로에서는 영화와 관련된 것을 별로 보지 못했거든요. 제작사나 배급사, 영화배우나 감독이나.. 등등 충무로에 있나요? 충무로가 왜 영화로 유명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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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영화하면 충무로 인데요 1955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 이 국도극장에서 개봉해 두달간 서울에서만 12만명을 동원햏다 당시 서울인구가 150만명 이었으니 완전 대박 사건이었고 연이어 <자유부인> 11만명등 충무로 극장가 의 황금알 그리고 주변환경도 땅값이 싼 충무로가 제격이었다 무려 영화사가 70여개 가 난립 하였다고 합니다 주변에 다방,여관에 지망생이 넘치게 늘어났다 6/70년대 명실상부 한국영화의 메카였다

    90년대 이후 하나들 이사를 떠났다고 그래도 영화소품을 전달해주는 오토바이가게 ,사진관,출력소,배우지망성등 상당수의 영회사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댜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1.05.30

    <브르고뉴, 와인으로 찾은 인생 영화>를 보기위해 대한극장을 가는데 충무로역에 "충무로 영화의 길"로
    지하철 벽면을 구성하고 있었다.
    충무로라고 하면 당연 영화로 유명하다는 것을 막연히 알고는 있었지만 왜 그렇게 영화의 거리가 되었는지?.
    대학다닐때 대한극장을 많이 찾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대형사에 밀려 그 명맥만 유지해 오는것 같다 싶은 생각에 씁쓸한 맘까지.
    그렇지만 돈이 안되는 예술영화를 관람할 수 있게 해 주는것에 난 감사한 마음반 미안한 맘도.
    소극장에 물론 스크린은 크지만 관객은 10여명정도~~
    영화 시작전에 대한극장의 창업자며 역사에 대한 영상자료를 보여주는데
    많은 사람들이 극장을 찾아주어 옛 명성을 다시 찾을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럼 왜 충무로가 영화의 길이 되었는지?
    충무로가 어딘지를 알아본다.


    충무로는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1가 21번지(서울중앙우체국)에서 극동빌딩을 지나 충무로5가 8번지에 이르는 길이 1.75㎞,
    너비 10∼20m인 도로이다.
    도심지 남쪽을 동서로 관통하며 퇴계로와 명동로 사이에 있다.
    일제시대에는 본정통이라 불렀고, 1946년 10월 1일 이순신의 시호를 본따 현재의 도로명이 되었다.
    시내버스 노선이 지나지 않는 좁은 도로로서, 길 양옆에 극동빌딩·대원빌딩 등 고층건물이 밀집해 있다.
    1∼5가로 이루어지며, 조선시대에는 잔반과 하급관리 및 중인들이 모여 살았다.

    2가 중국대사관 뒤쪽에서 세종호텔 뒷길에 이르는 낮은 언덕은 예로부터 진고개[泥峴]라고 불렀는데,
    이곳에 일본 공사관이 들어선 뒤 1885년 무렵부터 일본인들이 부근에 터를 잡기 시작해 청일전쟁 후에는 1∼4가 일대에 이른바 혼마치라는 일본인촌이 형성되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존속되었다.

    원래 중국대사관 자리는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포도대장 이경하의 집이었으나
    1889년부터 10여년 동안 주답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로 온 위안스카이가 이곳에 거주하면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1960∼1970년대 이후 문화·예술·영화인의 거리로 유명해졌다. 주변에 서울중앙우체국·중부경찰서·영락병원·
    매일경제신문사·중구청 등의 공공기관과 진양상가·남대문시장 등이 있다.
    남산 1호터널로 이어지는 청계고가도로가 지나고 지하철 3호선과 4호선이 만나는 충무로역이 있어 갈아탈 수 있다.

    충무로가 영화의 본고장이었던 이유~~~
    충무로가 한국 영화의 발상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06년 경성부 진고개 부근의 '송도좌'에서 처음 영화를 상영했을 당시다. 중구문화원에서 발간한 서적 '영화의 메카 충무로'에 따르면 이것을 효시로 1910년 경성부 황금정(현 외환은행 본점)에 '경성고등연예관'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영화관으로 인기를 모았다.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의 적개심을 유화책으로 다루기 위해 충무로 일대에 영화관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향토사학자인 서울중구문화원의 김동주 총무과장은 “그 뒤를 이어 1914년에 '제2대정', 1916년에 '경성극장', 1917년에 '낭화관', 지금의 충무로 5가에 '조일좌', 1922년에 초동에 '수좌'(후에 경성촬영소), 현재 중앙시네마로 분한 '중앙관'이 등장했다.

    이어 1935년 현재 아시아미디어타워 부지에 설립된 '와카쿠사극장'이 등장하며
    충무로는 본격적으로 한국 영화의 메카가 됐다”고 말했다.
    '와카쿠사 극장'은 광복 후 수도극장, 스카라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지난 2006년 아시아미디어타워에게 그 자리를 내줬다.
    필름의 원거리 이동이 쉽지 않은 때에 극장들이 많이 모여있다는 것은
    곧 영화사와 필름 현상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복 후에도 영화인들은 충무로에 모였고 당시 충무로에 있던 대원호텔은 영화감독, 시나리오작가,
    지방 흥행사들의 숙소로 언제나 만원이었다.

    1961년 국도극장과 명보극장은 배우 김지미가 주연한 영화 '춘향전'과 최은희가 주인공을 맡은 '성춘향'이 동시 개봉하며
    경쟁을 펼치기도 했다.
    1973년에는 국립영화제작소와 영화진흥공사가 남산동 3가에 오고 돈화문로에는 영화단체와 제작소가 늘어서고
    대한극장, 명보극장, 스카라극장, 국도극장, 중앙극장, 서울극장, 단성사, 피카디리 극장 등이 대거 충무로, 종로 등지에서
    명맥을 유지하며 '충무로'는 영화 산업을 의미하는 용어로까지 사용되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대형기획사들이 강남 테헤란로와 압구정으로으로 옮겨 갔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충무로는 영화의 메카로 불려지고 있다.

    내년이 한국영화 100주년이고 10월 27일이 영화의 날이라고 처음 알았다.
    영화를 좋아했지만..
    지금도 한국영화가 거듭발전을 하고 있고 언제부터인가 웬만한 외국영화들은 한국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는 것같았는데 한국영화가 100주년을 계기로 작품성있고 의미있는, 세계적인 영화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그것은 영화인들의 몫이 아니라 당연 관객의 관심과 참여가 되어야겠지만..

    여기서 하나더 한국영화 최초는?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는 최초의 영화감독인 김도산이 감독한 <의리적 구투>로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선보였고
    그의 첫 작품이 공연된 바로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정해졌다고 한다.
    김도산감독의 본명은 김진학, 충무로에서 태어나 악역에 능한 배우로서 영화 연출까지 했던 것으로 연극계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신파극으로 공연하던 <의리적 구투>를 연쇄극으로 만들었으며
    당시 관람료를 연극 입장료 40전보다 비싼 1원을 받았으나 연일 만원으로 영화가 크게 성공했다고 한다.
    그의 연쇄극 연출 성공으로 국내엔 이후 연쇄극이 계속 제작되었다고.
    김도산은 연쇄극 아닌 본격 극영화 연출에 뜻을 품고 31세 때인 1922년 <국경>이라는 영화의 연출을 맡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국경>을 촬영 도중 그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 연쇄극 : 연쇄극이란 서구에서 말하는 키노 드라마로, 연극과 영화를 연쇄적으로 보여주는 형태.
    연극 무대에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고,
    연극으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 나올 때는 스크린을 통해 영화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 장면들은 자연히 야외에서의 사건들을 표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