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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12.25

삼국지의 촉나라 무장 관우는 어떻게 죽었나요?

삼국지 시대의 관우는 워낙 유명한 무장이라서 후대에 무신이라고 사당까지 생겼는데요.

관우는 손권측에게 죽은걸로 아는데 손권은 관우를 왜 죽인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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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관우와 같은 경우에는 오나라의 여몽에게 붙잡혔고 이에 따라서

    손권의 항복권유를 거절하여 죽게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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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손권은 당시 관우의 수하로 강릉을 지키고 있던 미방등을 회유하고 관우를 기습하여 남군을 점령하였습니다. 이 때 관우는 번성과 양양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조인을 지원하기 위해 온 서황에게 패배하고 번성의 포위를 풀었습니다. 이때 남군이 손권의 손에 넘어갔다는 말을 들은 관우는 양양의 포위도 풀고 손권과 싸웠으나, 여몽의 계략으로 병사들이 전의를 잃어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맥성으로 달아났습니다. 포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손권에게 거짓 항복도 시도해 보았으나 간파당했고, 몰래 달아나려 했으나 주연, 반장 등의 포위에 걸려 그의 아들 관평, 사마 조루와 함께 반장의 부장 마충에게 사로잡히고 맙니다. 관우가 손권에게 끌려가서 항복을 권유 받았을때 "옥은 깰 수 있으나 그 흰빛을 바꿀수 없고, 대나무는 태울 수 있으나 그 곧음을 꺾을 수 없소이다"라고 하며 죽기를 원하였고 결국 관우와 관평은 참수를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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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관우는 촉나라 장수고 손권은 오나라세력입니다.

    경쟁 세력의 대단한 인재이며 우리편이 될 확률도 없으니 죽이는게 당연합니다

    (조조가 엄청난 재물과 권력을 줘도 다 버리고 유비한테 간 전적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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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여몽전에 이르길 이때 관우가 번성을 토벌하면서 공안과 남군에 수비병을 많이 남겼는데 관우가 자신의 뒷치기를 두려워 한다고 알아챈 여몽은 계책으로 병 치료를 명목으로 건업으로 돌아갔다. 관우가 이를 믿고 점차 병사를 번성으로 보냈다. 당초 여몽을 대신하여 육구에 도착한 육손이 관우에게 관우를 치켜 세우는 편지를 보내자 오만해진 관우는 오에 대한 방비를 게을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편지에서 육손이 관우에게 편지를 보내 적극적으로 협력을 약속하였는데 관우는 이 말을 듣고 오판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위에서 우금을 시켜 번성을 구하게 했지만, 관우는 우금 등과 인마(人馬) 수만을 다 잡아 들이고 양곡이 부족함에 기탁해 상관(湘關)의 미곡을 마음대로 취하였다. 삼국지집해 여몽전에 수록된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면 여기서 상관은 익양대치 시 서쪽 촉한이 취한 영릉지역으로 영릉의 치소인 청릉현 옆이다. 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상수를 경계로 삼고, 관을 물 위에 설치하야 상인과 여행객을 통하게 해 이를 상관이라고 일렀다라고 했으니 해당관은 양측의 경계에 있었으며 이곳을 지나가는 인원을 관리했다고 보인다. 상관과 번성은 수백리가 넘으니 관우가 직접 취하진 않았을 것이며 관우 휘하의 관리들이 이를 취했을 것이다.

    애초에 관우를 칠 생각이던 손권은 이를 듣고 마침내 실행에 옮겼는데, 먼저 여몽을 파견해 선봉에 서도록 했다. 여몽이 심양에 이르러 그의 정병들을 모두 배 안에 숨겨두고, 백성들에게 상인의 복장을 입히고 노를 젓게 하여 관우가 강변에 세워둔 둔영의 관측소에 이르러 모두 잡아 포박해 버리니, 이 때문에 관우는 알지 못했다. 마침내 남군에 도착하자, 사인과 미방이 모두 항복했다. 호삼성은 이를 보고 미방과 사인의 투항이 없었다면 관우가 오의 기습을 일찍 알아차렸을 거라 평가했다.

    당시 남군태수 미방이 강릉에 있고 장군 부사인이 공안에 주둔했는데 그들 모두는 관우가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것에 평소 원한을 품었었다. 관우가 출군한 이래 미방, 사인은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그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자 관우가 "돌아가면 응당 죄를 다스릴 것"이라 하니, 미방과 사인은 모두 두려움을 품고 불안해했다. 이에 손권이 은밀히 미방과 사인을 꾀자 미방과 사인은 사람을 시켜 손권을 영접했다.

    여몽전 오록에 따르면 사인은 본디 항복할 마음이 없었고 오군의 항복사자인 우번을 내치기까지 했으나 우번이 편지를 보내 내응이 있었으니 이렇게 대응하지 못할 지경으로 포위된 것이며 이대로 있어봐야 살길은 없고 죽도록 싸워봤자 당신의 일족만 멸살될 것이며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라 협박하니 눈물을 흘리며 항복하였고 우번이 이는 속이는 병사이니 사인을 응당 끌고 가야한다고 주장하여 남군으로 끌고갔다고 한다. 여몽전 주석 오록에 따르면 당초 남군성 내에 실수로 불이 나 자못 많은 군사기물을 태웠다. 관우가 미방을 질책하자 미방이 내심 두려움을 품었는데 손권이 이 일을 듣고 그를 꾀자 미방이 몰래 서로 화합했다고 하며 여몽이 남군을 공격하자 소고기와 술을 준비해서 저항없이 항복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말 그대로 미방만 항복한것이고 다른 남군 사람들에게 항복은 너무나도 의외였기 때문에 여몽을 치려는 움직임이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번은 한참 미방에게 받은 기물로 주변사람들과 성밖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는 여몽에게 '현재 충실한 마음으로 투항한 자는 미방뿐인데 성안의 사람들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신속하게 성으로 들어가 그 성의 권력을 잡지 않는가?'라고 진언했고 여몽은 그제서야 남군으로 들어가 마침 반격을 준비하던 성안의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관우가 양양의 포위를 풀고 퇴각하자 조인을 비롯한 위군은 그런 관우를 추격하려고 했지만 조엄이 '손권은 관우의 배후를 치려고 우리에게 순종하고 있지만 실상은 우리 군사력을 관찰하고 있으며 지금 관우를 추격하면 손권의 태도가 바뀔 가능성이 있다'며 추격을 반대하였고 조조 역시 관우를 장수들이 추격할까 걱정하여 추격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자 추격을 포기했다며 조엄전에 전한다. 한편 오나라의 장수 장흠은 함대를 이끌고 면수로 들어갔다. 단 장흠전에는 면수로 들어갔다가 나온 기록만 있어 실제 관우의 수군과 교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여몽은 강릉을 차지해 그곳의 노약자를 위로하였으며, 우금 등의 죄수를 풀어 주었다. 동시에 육손은 별도로 의도를 손에 넣고, 자귀, 지강, 이도를 손에 넣고 이릉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협구를 지켜 촉의 침공에 대비했다고 오주전에 전한다. 관우는 돌아오면서 길에서 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 여몽에게 보내 서로 묻게 했는데, 여몽은 번번이 그 사자를 후하게 대우하고, 성중을 두루 다니게 하며, 집집마다 묻게 하고, 혹은 손수 글월을 써서 신의를 보였다. 관우의 사람이 돌아오자, 사적으로 서로 참여하여 묻고는, 모두 자기 집에 무탈하다는 것을 알고, 평시보다 과하게 대우받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관우 군대의 관리와 병사들은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거기에 관우군의 처자들이 일종의 인질이 되었는지 손권이 이미 강릉을 점거하고 관우 사졸들의 처자를 모두 사로잡자 관우군이 마침내 흩어졌다.

    수경주에 이르길 강릉의 옛 성은 관우가 쌓은 것인데, 관우가 북쪽으로 조인을 포위하자 여몽이 이를 습격하여 점거했다. 관우가 이르길, "이 성은 내가 쌓은 성이니 공격할 수 없다."고 하고는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이에 관우는 당양으로 돌아와 서쪽으로 맥성을 지켰다. 중국의 학자 전부생(田福生)은 자신의 저서 《관우전關羽傳》에서 맥성은 수백 가지고는 수만의 오군에 한달간 대항할 수 없다며 맥성에 2만명이 주둔했을거라 여겼다. 어쨌거나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급기야 관우는 거짓항복까지 시도하면서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맥성과 임저의 위치를 보건대 관우는 이미 장악당한 영안 방면이 아니라 상용 방면으로 어떻게든 돌파할 작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우는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와해되어 흩어졌으며, 단지 10여 명의 기병만이 그를 따랐다. 손권은 우선 주연과 반장을 시켜 그가 지나갈 지름길을 끊어 놓았다. 관우가 패하자 손권은 우번으로 하여금 관우의 종말에 대하여 점치도록 했다. 우번이 말했다.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머리가 끊어질 것입니다.'라고 하니 과연 우번의 말같이 되었다. 때는 12월,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역격(逆擊)하고 반장의 사마 마충이 장향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를 사로잡아 더 이상 도망 못가도록 붙잡았으며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을 형주 남군 임저현 회마파(回馬坡)에서 참했다.

    이때 손권은 장군을 보내 관우를 공격하고 관우와 그 아들 관평을 붙잡아 손권이 관우를 살려 유비와 조조에게 대적하려 하자 좌우에서 말했다.

    이리 새끼는 기를 수 없는 법이니 훗날 반드시 해가 될 것입니다. 조조가 즉시 그를 제거하지 않아 스스로 큰 우환을 불러들여 도읍을 옮길 의논을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어찌 그를 살려준단 말입니까!


    이에 관우의 목을 잘랐다. 이는 촉기의 기록인데 배송지는 이 기록에 대해 손권이 있는 강릉과 관우가 목이 잘린 임저는 200~300여리나 거리가 된다며 그르다 평가했다. 그렇다면 관우는 난전중 전사를 했거나, 현장에서 지휘하던 여몽이나 관우를 사로잡은 반장 등의 최종적인 판단으로 인해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손권 앞에 관우가 붙잡혀 온 것은 오서 오범전에서도 교차검증이 되는 부분이므로, 애초에 손권이 임저 부근까지 직접 주둔해 있었을 수도 있다. 정사 속 배송지의 주석이 모두 타당한 것만은 아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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