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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7

6.25 당시 가평전투라고 있었다는데 어떤 전투인가요?

6.25 당시 호주, 뉴질랜드 군의 참전과 관련된

가평전투가 있었다는 기사를 접했는데요.

이 전투가 어떤 사건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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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거운도라지볶음
    무거운도라지볶음23.06.27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국 연방 제27여단이 1951년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가평일대에서

    중공군 제118사단의 공격을 방어해서 중공군의 전선분할 시도를 좌절시킨 전투입니다.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가평전투가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1951년 4월 23일부터 4월 25일까지 경기도 가평 일대에서 영연방 제27여단이 중국군과 벌인 전투를 말합니다.

    현재 가평의 가평읍 대곡리에 영연방참전기념비가 설립되어 있으며,

    북면 이곡리에는 캐나다전투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북면 목동리에는 호주전투기념비와 뉴질랜드전투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호주에도 가평전투를 기념하기 위해서 길 이름을 가평로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연방 제27여단은 1951년 4월 22일 국군 제6사단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하여 가평일대로 진출하였다. 여단은 캐나다 대대를 가평천을 감제할 수 있는 좌전방 내촌(內村) 부근의 677고지에, 호주대대를 가평 계곡을 통제할 수 있는 우전방 죽둔리의 504고지에 배치하는 한편 아질 대대를 예비로 가평 부근에 집결 보유하였다. 그리고 여단에 배속된 미 전차 제72대대 1개 소대를 죽둔리에 배치하였다.

    사창리를 돌파한 중공군 제118사단이 4월 23일 야간공격을 재개하자, 국군 제6사단은 경계부대인 미들섹스 대대와 함께 철수하여 가평 북쪽 가평천변에 배치되었다. 중공군은 호주대대의 배치 상황을 모르고 신속히 가평을 점령할 목적으로 종대대형을 유지한 채 도로와 계곡을 따라 내려 왔다. 우전방 호주대대는 대대의 화력은 물론 지원된 전차 및 포병화력을 기습적으로 집중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4월 24일 01:00경 전방에 배치되었던 전차소대가 재보급을 위해 철수하자 즉시 2개 대대로 포위공격을 기도하였다. 반면 호주대대는 통신이 두절되어 전방중대와 연락은 물론 포병의 화력지원도 요청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후방의 대대지휘소와 박격포진지마저 피탈되어 최악의 상황에서 근접전투를 펼치게 되었다. 대대는 포위된 상황에서도 일부 진지가 피탈되면 즉시 역습으로 회복하면서 새벽까지 504고지의 방어진지를 고수하였다. 날이 밝아 아군의 항공폭격과 포병사격이 집중되자, 중공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다수의 사체를 유기한 채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즉시 추격작전을 펼친 영여단 수색대는 죽둔리 부근에서 중공군 40명을 생포하였다.

    전반적인 상황을 분석한 영 여단장은 적이 일시적으로 철수하였지만 이 지역에서 장시간 체류하면 오히려 피해만 증가할 것으로 판단하고, 호주대대를 미들섹스 대대 후방으로 철수토록 하였다. 대대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하여 오전에 연료 보충과 장비 점검을 완료한 미 전차 소대가 복귀하여 화력으로 중공군의 추격을 저지하였고, 제16포병연대도 연막탄과 고폭탄을 사격하여 적의 시계를 차장하고 대대의 철수를 지원하였다.

    중공군은 23일과 24일 양일 동안 비교적 기동이 용이한 가평천 골짜기를 따라 진출하여 서울∼춘천도로의 차단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여단의 강력한 저지작전과 포병의 화력지원에 많은 인명 피해를 입게 되자 25일 새벽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따라서 적의 유엔군 전선 분할 기도는 완전히 좌절되고, 아군은 북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게 되었다. 영연방 제27여단은 3일간의 혈전을 종료하고 25일 밤에 양평으로 철수하였고, 부대명칭도 영연방 제28여단으로 개칭하였다. 아군은 사창리가 돌파되면서 가평이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으나 영 제27여단의 선전으로 가평을 고수하여 중공군의 전선분할 기도를 좌절시켰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유엔 사령부소속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영국군 부대가 중공군과 가평에서 맞붙은 전투입니다. 전투는 중공군 공세 때 발생했으며, 2ㅔ27보병여단은 남쪽의 서울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 중 하나인 가평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고 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왕립 연대 제 3대대와 프린세스 페트리샤 캐나다 경보영연대 제2대대가 전방대대의 임무를 맡았으며 뉴질랜드 2016포병연대 그리고 미군 박격포 부대와 셔먼 전차 15대가 이들을 지원했으며 사창리 전투에서 패배한 대한민국 제6사단 병사들이 협곡을 통해 철수하자 중공군은 여단의 방어지역으로 침투해 504고지에 위치한 오스트레일리아군을 공격했고, 전투는 다음날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야간 전투 이후, 중공군은 캐나다군을 물리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격렬한 전투 동안 2개의 대대는 중공군 사단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고, 중공군은 4월 25일 가평 북쪽으로 철수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전쟁 때인 1951년 4월 경기도 가평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1951년 4월 23일부터 4월 25일까지 경기도 가평 일대에서 영연방 제 27여단이 중국군과 벌인 전투로

    중국군이 사창리 전투에서 국군 제 6사단의 방어선을 뚫고 남하해오자 영연방 제 27여단은 중국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가평의 북면 일대에 방어선을 편성했고 중국군이 가평을 점령해 서울과 춘천을 잇는 국도를 따라 남하해오면 서부전선의 유엔군이 측면에서 협공을 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연방 제 27여단은 사창리에서 가평으로 이어지는 도로 인근의 고지들에 병력을 배치, 중국군의 진격을 차단하려했고 도로 서쪽인 북면 이곡리의 677고지에 캐나다 대대를 배치, 가평천과 화악천이 합류하는 도로 동쪽의 북면 목동리의 504고지에 호주 대대를 배치합니다. 그리고 미들섹스 연대 제 1대대로 구성된 영국군 1개 대대를 예비부대로 편성합니다.

    4월 23일 밤부터 국군 제 6사단을 추격해 남하해온 중국군 제 118사단이 도로와 계곡을 따라 가평 방면으로 접근해왔고, 중국군은 그날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호주 대대가 지키는 목동리의 504고지에 공격을 가해왔지만 호주 대대는 고립된 상태에서도 진지를 사수하며 중국군의 진격을 저지했고 , 4월 24일 날이 밝은 뒤 중국군이 공격을 멈추고 물러나자 추격해 40여명의 중국군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러나 호주 대대는 전투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 중국군에 퇴로가 차단된 채 포위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4월 24일 영국군 대대의 후방으로 철수하자 중국군은 그날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캐나다 대대가 지키는 677고지 방면으로 집중공격을 했고, 밤새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영연방 제 27여단은 중국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고지를 지키는데 성공합니다.

    4월 25일 중국군이 공격을 멈추고 철수, 영연방 제 27여단은 그날 밤 미 제 5기병연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양평으로 철수해 부대를 정비, 영연방 제1사단의 창설 계획에 따라 영연방 제 28여단으로 재편되었고, 가평 전투에서 중국군은 사망자 1천여명에 이르는 손실을 입고서도 목표를 이루지 못했으며 이 전투에서 호주 대대는 32명이 전사, 3명 실종, 59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캐나다 대대는 10인이 전사자, 23인의 부상자 발생, 미 전차부대와 뉴질랜드 포병부대에도 5명의 전사자, 17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가평전투에서 영연방 제 27여단이 3일동안 중국군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유엔군은 북한강을 경계로 방어선을 구축할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수 있었고, 서울에서 춘천을 잇는 도로를 지켜내 전선을 분할하려는 중국군의 계획을 무너뜨릴수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가평전투는 6.25전쟁 당시

    영연방 제27여단이 1951년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가평일대에서 중공군

    제118사단의 공격을 방어한 전투를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