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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곤잘
라울곤잘23.02.06

춘천지구전투는 어떠한 전투였나요?

6.25전쟁 초기 전투라고 알고있는 데요.

춘천지구전투는 어떠한 전투였는지 궁금합니다.

정확하게 어떠한 전투였는지 답변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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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사단이지키고 있던 춘천일대에서 있었던 5일간(1950.6.25~29)의 전투는 미리 준비를 철저히 한 김종오 사단장과 6사단 전 장병의 노력으로 인해 전쟁초기 대승을 거둔 전투입니다. 아군 피해는 적에 비해서는 극소수였죠.

    1950년 6월 19일 6사단(사단장 대령 김종오)은 귀순한 포로의 진술을 토대로 곧 적이 남침 내지는 국지적 도발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23일부터는 전군 비상해제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출/외박을 제한하면서 철저한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6사단 정면에 배치된 적은 북한군 2군단으로 25일 개전과 동시에 2사단을 춘천방면으로 7사단을 홍천방면으로 투입했죠.

    6사단 7연대는 북한군의 집중 화력공격과 기습공격에도 물러나지 않고 38선 접경지역의 산악지대의 능선군과 소양강, 봉의산 등 지형적 이점을 적극 활용, 배수진을 쳤습니다.

    6사단 57㎜ 대전차포 중대의 경우 계속 남하하는 적 SU-76 자주포를 저지하기 위해 정면에서 조준사격을 실시했으나 실패했고 적 자주포 10대는 계속 공격을 시도해 왔습니다. 이에 57㎜ 대전차포 소대장 심일은 중대장으로부터 특명을 부여받고 5인조 대전차 특공대를 결성, 옥산포 소나무 숲에 숨어있다가 SU-76 자주포가 지근거리까지 접근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수류탄과 화염병으로 공격해 적 자주포 2대를 격파하고 승무원 한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 전투에서의 빛나는 전공은 7연대 전체 장병들에게 알려져 전차공포증이 제거되고 필승의 투지를 불러일으켜 춘천전투 승리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또한 16포병대대(대대장 소령 김성)의 경우 105㎜ 곡사포의 화력으로 대응사격을 실시해 적 2사단 4연대와 6연대에 대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적 2사단의 예비로 있던 적 17연대도 재차 소양교 도하를 시도했으나 포병대대의 집중사격으로 속수무책으로 섬멸당하고 말았죠. 이 전투로 인해 북한군 2사단의 전투력은 무력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상자만 북한군 6792명(아군 전사자는 208명)에 이를 정도가 되자 북한군은 전의를 완전 상실했고, 6사단은 홍천과 원주 방면으로 성공적인 철수를 하게 됩니다.

    이 전투후 북한군은 춘천패전의 책임을 물어 2군단장을 직위해제하고 7사단의 이름을 완전히 삭제해 버렸다고하죠.

    `춘천대첩'은 6·25전쟁 개전 초 국군만의 단독 사단급 방어 전투의 승리였으며, 한강방어선이 형성될 시간 및 UN군의 초기 참전시기를 확보하는 한편 6사단 전체의 안전한 철수를 통해 장차 작전에서 국군으로 하여금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케 한 엄청난 승리였습니다.

    한마디로 초기 전투양상은 6사단으로 인해 유리한 발판을 조성할수 있었다고 봐야겠죠.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투는 1950년 6월 29일부터 7월 19일까지 21일간 이어졌으며, 북한군이 전선을 돌파하여 한국군이 물러나는 중이었던 때에, 유능한 지도력을 보여준 김삿갓단이 주도하는 지역민의 민간군이 춘천지구에서 북한군을 막아내며 전투가 일어난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춘천지구전투는 6.25 전쟁시에 초기 국군 제 6사단이 춘천 홍천 지역에서 북한군 제 2군단의 공격을 저지해 국군의 조기 붕괴를 막아낸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국군 6사단은 방어에 유리한 춘천의 소양강과 홍천의 말고개 일대에서 지형적인 이점을 최대로 이용해 6일동안 방어전을 전개했고, 이 과정에서 북한군 2개 사단은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북한군 제 2군단은 예하의 병력을 춘천 홍천 이천 수원 축선으로 우회해 움직여 국군의 병력 증원과 퇴로를 차단함으로, 그들의 제 1단계 작전에 기여한다는 처음의 작전 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만들었고, 반면에 국군은 한강남안에 방어선을 형성할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