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심심한호랑이161
심심한호랑이16123.04.07

현대 인물중 이승만의 평가가 엇갈리는 이유가 있을까요?

우리나라 현대사 인물 중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거 같아요

허수아비 대통령이라는지 민주주의 첫걸음 이라는지 그에 대한 평가나 일생이 궁금하네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9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남한의 자유주의를 대표했던 민족의 지도자였음과 동시에

    권력욕에 잠식당해 독재자가 되려했기에 평가의 양면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07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승만 때문에 병역 의무로 한국 국민이 고통 받은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군대가 환경이 좋고 군인 대우가 좋으면 모병제로도 충분해서 징병제가 필요없다는 주장도 1960년에 임기가 끝난 이승만과는 무관한 주장이는 것. 오히려 장군대비 병사의 월급이 역대 가장 높았던 정부가 이승만 정부였다. 병장이 준장 월급의 10%를 받았으며 심지어 2020년 현재에도 이것에 한참 못미친다.

    그리고 일본 자위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모병제가 된다고 반드시 군에 대한 대우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군인에 대한 대우와 똥군기는 징병제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며, 단순히 모병제로 바뀐다고 군인에 대한 대우가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오산이다.

    심지어 군인에 대한 대우가 좋다고 평가받는 미군조차도 이라크 전쟁 이후로는 지원자가 없어서 인원수를 충당하기 위해 갱스터, 양아치, 저학력 백수들까지 선발해서 병사들의 질적 저하가 문제되고 있다. 또한 미군과 한국군을 비교하기도 힘든 것이, 미군은 이미 당시로도 세계 1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던 국가였으며, 자국 군대를 넘어 유럽과 소련에게 물자 지원을 퍼줄 정도로 경제력이 넘사벽이었기에 병사들을 충분히 먹여 살릴 자본이 넘쳤지만, 정부수립 당시의 대한민국은 경제 전반이 빈약했다. 모병제조차도 나름의 문제점이 있으며, 모병제가 되었다고 무조건 징병제보다 낫다고 볼 수는 없다. 군인이란 직종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미 기피 직종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징병제는 오히려 대한민국에 긍정적 영향들을 끼쳤다. 1945년에 식민지에서 벗어난 이후 한국은 소수의 도시민들을 제외하곤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던 농촌 사람들은 여전히 전근대적 구습과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은 1950년대 실시된 징병제 아래 군대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생활양식을 배우고 근대적인 기계들을 다루는 기술도 배우거나 글 읽는 법도 배웠다.[1]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지금 우리는 군대라고 하면 왠지 구습의 상징 같은 시대에 뒤떨어진 곳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1950년대 기준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징병제를 통해 전국 방방곳곳의 수많은 농촌 출신들이 근대화되었고 군대에서 배운 기술과 조직력, 협동심, 집단생활 경험은 1960년대의 경제발전에 긍정적으로 연결되었다.[2]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가 내려지는 데는 이승만이 군인 출신이 아니기 때문인 것도 한 몫 한다. 역으로 군인 출신인 박정희 때부터 나라 수준에 비해 군대는 더욱 열악해졌다.

    이에 반해 부정적인 시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1945년 광복 직후 미군정 시기에는 국군 창설을 준비하면서 의용병제 즉 모병제를 시행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당시는 개별 부대의 지휘관들이 주둔지 부근 지역을 돌면서 청년들에게 입대를 권유하는 식으로 모병을 하였다.[3] 그러다가 1949년 8월 6일 병역법을 공표하면서 국민개병제, 즉 징병제를 도입하였고, 행정적인 준비를 거쳐서 그 다음해인 1950년 1월 6일에는 최초로 전국적인 징병검사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가재정을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에 기대고 있던 상황에서 미국이 "국군 10만명 제한", "그 이상의 원조는 어떤 경우에도 없음"이라고 못을 밖으면서 징병제는 징병검사 한번 이후 바로 유야무야돼버렸다. 결국 1950년 3월 다시 병역법을 개정해서 징병제를 폐지하고 미국의 요구대로 모병제로 전환하였다.

    이승만 정권이 미국으로부터 물자 원조를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징병제를 고집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모병제를 권유하는 미국을 설득하지도 못했고 국가 안보의 초석이 되어야 할 병역 제도가 고작 8개월 동안 모병제 → 징병제 → 모병제 식으로 지그재그 하면서 혼란만 일으켰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당장 다급해진 이승만 정권은 가두모집, 가택 수색 등의 방법으로 청년들을 강제 징병하기 시작했고, 그 이듬해인 1951년 5월에야 병역법을 개정하면서 공식적으로 징병제를 재도입하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미국의 감군 요구에도 불구하고 60만 대군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현재까지, 60년이 넘게 징병제를 고수하게 된 것이다.

    출처: 나무위키 이승만/평가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승만은 오늘날까지도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등을 주도한 대한민국의 국부임과 동시에 장기 집권과 집권기에 벌어진 학살 등, 독재자라는 아주 극단적이며 상이한 평가를 받고 있는 몇 안 되는 현대사의 인물 중 한 명이다. 라는 답변을 구하였습니다


  • 나무는 열매를 보아 판단하듯이

    사람 또한 그 사람의 삶의 흔적이 그 분의 열매입니다.

    사람마다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에 따라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의 삶의 흔적들, 수많은 역사적인 자료들을 통하여

    판단한다면 아마도 민주주의의 첫걸음, 국부라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민간인을 가장 많이 학살한 사람일 것입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이승만은 이 땅의 왜곡된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미화된 것이라는 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수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

    2.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한미동맹으로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존한 것

    3. 4.19혁명 이후 순순히 정권에서 물러나 퇴장한 선례를 남긴 것


    한강다리 폭파하고 전쟁 발발 당시 허위 방송을 한 사실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없으나 미국을 전쟁에 개입시켜 이 나라를 구했으며, 휴전협정이 다가올 때는 미국을 압박하여 한미동맹이라는 울타리를 얻어낸 것이 이승만 대통령입니다. 북한이 우리나라보다 한창 잘 살고 군사력이 우리를 크게 압도할 때 미국이라는 동맹국이 없었으면 우리가 지금 키보드를 두들기면서 자유롭게 정치를 논하고 역사를 평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건국 이후의 좌파 세력의 득세로 이 나라가 공산화 될 위기에 놓여있을 때에 유능한 정치지도자 중 가장 강력하게 반공을 주장하여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대한민국을 건국하게끔 한 사람이 이승만 대통령입니다. 현재도 존경받는 김구 선생같은 경우는 끝까지 하나 된 한반도를 주장하며 김일성과 평화협상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김일성은 애초부터 한반도의 공산화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김구 선생은 김일성에게 이용만 당했었습니다.


    3.15부정선거도 역사를 자세히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함부로 이승만 대통령을 욕할 수가 없는게 이승만은 당시 민주당 후보인 조병옥이 사망한 상태였기에 무투표 당선이었고, 이승만이 대통령 임기 수행 도중 노령으로 인하여 사망했을 당시를 대비하기 위해 부통령에 어떻게든 이기붕을 당선시키고자 한 자유당의 부정선거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본인은 3.15부정선거에 대해서 몰랐었고, 4.19혁명 이후 부정선거가 있었다면 확실히 조사를 해야하고 국민이 원한다면 선거를 다시 하겠다고 선언까지 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얼마 안 가 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것을 칭찬하며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사임했습니다.


    좌파 세력이 이승만 대통령을 공격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친일파를 처벌하지 않고 그들과 손을 잡았다고 하여 권력에 눈이 먼 늙은이로 몰아내고, 대다수의 학교에서도 이렇게 가르쳐서 이승만 대통령을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있는데, 공과 과를 구분할 때에는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한 법입니다.


  • 우리 사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에 대한 객관적 접근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 청산에 철저하지 못했고, 장기 집권과 선거 부정으로 민심 이반을 겪으며 4·19 혁명으로 물러났습니다. 반면에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여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여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만약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었다면이 나라는 아마 공산주의 국가가 됐을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왕족으로 태어나서 예수를 믿고 왕정대신 민주주의를 해야한다는 주장으로 고종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선교사에 의해에 사면을 받은 후 미국에 가서 5년 반만에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은 천재였습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이러한 짧은 시간내에 박사학위까지 끝낸 사람은 없습니다. 이승만은 학문적으로만 박사인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 한국이 어떻게 하면 올바른 나라가 될 것인지를 바로 알고 백성들에게 기독교 입국론, 자유 시장경제, 자유 민주주의, 한미동맹을 이끌어낸 우리의 위대한 국부이십니다. 그는 또한 선지자로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할 것이라는 "Japan inside out"이라는 책도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 공습이 있을것이라고 수년전 출간을 하였습니다. 만약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다면이 나라는 지금과 같이 부강한 나라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과 일본인들의 거짓교육으로 이승만의 공은 없어지고 과만 들어와 독재자로 불렸던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평가가 엇갈리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그의 정치 생애는 국내외적인 여러 사건과 사고들이 잇따르며 복잡하고 다양한 평가를 받을 만큼 다양합니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민주주의적 가치와 인권 등을 무시하는 독재적인 통치를 이어간 것으로 비판받기도 합니다. 특히, 5.16 군사정변 이후 6.25 전쟁에 대한 대응 방식이 여론 대부분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당국자들이 국민의 비난과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 정책도 평가가 분분합니다. 그는 대한민국의 국제적인 지위를 높이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국제기구에 가입하는 등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한편으로는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정치 생애와 업적에 따라 다양하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가장 평가가 엇갈리는 부분이 바로 친일 청산 부분 입니다. 이승만은 일제 강점기 때 항일 운동을 하고 독립에 기여했지만 독단적인 행동으로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을 여러 차례 일으켰으며,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위원회의 해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어지금까지도 대한민국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좌익과 우익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친일파가 반공애국 투사로 변신했고 반민족 행위자 처벌보다 반공을 더 중요시 여긴 이만 정부는 민족 정기를 바로잡는 과제 즉, 친일파 청산이 미뤄지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