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가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지 못 했다면 이씨조선의 뿌리자체가 흔들렸다는 설이 있는데 사실인가요?
세조가 계유정란을 통해 어린 단종을 폐위하고 정권을 잡지 못했다면 이씨조선의 뿌리자체가 흔들려 정권자체가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이것은 사실인가요? 아님 후대학자의 단순 이견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계유 정란을 아야기 하기에 앞서 그 당시의 정치 상황을 먼저 좀 언급을 해야 할것 같습니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신이 죽운 후 어린 왕세자 문종이 등극하였을 때 잘 돌봐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단종은 즉위 당시 12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세종과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든 고명 대신 김종서가 조정의 인사권 및 정권과 병권을 쥐고 섭정통해 막강한 힘을 가집니다. 이 김종서의 세력과 맞서는 세력이 바로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과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세력이였지요. 조정의 신료와 왕실도 이 둘의 세력으로 양분화 됩니다.
점점 신료들과 양평대군의 세력이 연합하고 커지자 수양은 한명회등을 자신의 새력으로 만들고
명나라 사신길을 통해 신숙주를 완전히 자신의 세력으로도 만듭니다. 드디어
1453년(단종 1년) 11월 10일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드디어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게 바로 계유정란 입니다.
물론 이 과정 단종도 결국 숙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지요. 이렇게 수양대군이 세조로 등극하고 사관을 통해서 쓰게한 [단종실록] 에는 계유정난이 없었다면 김종서,황보인 등이 안평대군과 결탁해서 수양을 제거하고 조정을 결단냈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김종서등의 신료세력은 신하로서 어린 단종을 보필하려고 했을 뿐 수양대군을 제거하고 붕당을 지으려고 한것은 아닌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이유는 첫째, 단종실록 자체가 세조때 어용사관에 의해서 쓰여졌으며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계유정란때 죽은 사람들을 지나치게 비방하고 논죄한 점입니다. 두번 째로 정말로 신료새력들이 수양대군을 죽이고 붕당정치를 하려했다면 아마 수양대군이 명나라로 사신으로 갔을 때 수양대군을 제거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당시 신료들의 세력이 너무 과대했고 왕권이 약했던 것은 사실이기도 하고 ,또한 역사는 승자에게 유리하게 기록되기에 100% 확신할수는 없지만 계유정란이 없었다면 이씨 조선자체가 흔들렸을 것이라는 것은 후대 사가의 확대된 해석일것 같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테스티아입니다.
* 이견일 뿐입니다. 당시 수양(후의 세조)이 아니어도 문종이 현군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아들 홍위(후의 단종)이 즉위하여 정상적으로 조선의 명맥을 이어나가기 충분했었습니다. 즉, 사실상 세조 집권을 정당화 하기 위한 관점에서의 설일 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히려 계유정난으로 인해 적장손 왕위 계승이라는 원칙이 무너지고 많은 수의 공신들이 생기면서 왕권이 약화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리고 선대에서 후대로의 계승이라는 기본 원리 자체를 붕괴시켰기 때문에 오히려 왕위의 정당성이 사라지면서 '이시애의 난'과 같은 반란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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