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이 과거 어떤 이유로 독립문을 세웠나요?
이완용은 을사오적으로 아주 유명한 사람인데 왜 과거에 독립문이라는 것을 세웠는지 그 의도가 궁금합니다. 당시 역사적 배경이 무엇이었는지 답변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완용의 글씨가 새겨진 독립문 편액- 이완용은 독립문 건립을 위해 100원을 기탁했다고 합니다. 한글과 한자 편액이 앞뒤로 있습니다.
이완용은 특히 독립협회 내 정부측 인사로서 독립협회 제2대 위원장으로까지 활동했는데, 다음은 그의 연설 중 일부분입니다.
“독립을 하면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구라파의 폴란드라는 나라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 세계사에서 두 본보기가 있는데, 미국처럼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나 폴란드 같이 망하는 것 모두가 사람 하기에 달려 있다. 조선 사람들은 미국같이 되기를 바란다.”
여기서 서로 싸우거나 해치지 말자는 의미는 협회내 대다수인 수구파 출신과 소수 친미 개화파 출신의 단합을 요구하는 의미가 크다고 합니다. 그는 조선 시대 중국 사신을 영접했던 모화관의 정문으로, 조선 사대주의 구태(舊態)의 상징으로 지목됐던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을 설립하도록 뜻을 모았습니다. 독립협회 위원장을 맡았던 시절에는 독립신문의 가장 큰 후원자였으며 그야말로 독립협회 내 핵심요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독립문은 청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로 독립협회가 건축한 건물로, 워래는 영은문이 있던 자리였는데 청나라가 유럽 열강에 식민지화 되면서 독립협회가 영은문을 강제로 헐었고,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독립군가에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때까지 라는 가사가 나오는 것을 볼수 있듯 일제로부터 독립에 대한 염원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 청은 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이듬해 청일 간의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는데 여기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훼손하는 조공관계의 폐지를 선언하면서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합니다. 이제 조선 내부에서도 동네북이 되어버린 청나라와의 관계를 재편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고 조선 국왕이 직접 나가 칙사를 맞이하던 영은문은 철거됩니다.
동시에 조선 조정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갑오개혁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친일 인사들이 복권, 박영효는 같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한때의 동지인 서재필에게 조선으로 건너올 것을 권유, 서재필이 1896년 1월 조선에 와서 중추원의 고문이 되며 그와 동시에 진행한 것이 독립문 건립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2월 아관파천이 벌어져 상당수 친일 관료들이 입지를 잃거나 숙청, 서재필은 미국인으로 간주되어 입지를 보존할수 있었고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됩니다.
이 독립신문은 정부의 재정지권음 4400원이 들어간 만큼 친정부적 어용신문이었고 이 와중에 생성된 단체가 독립문 건립 추진위원회이며 이 독립문 건립추진위원회가 바로 독립협회의 모체가 됩니다. 즉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쌓은 것이 아니라 독립문을 쌓기 위해 독립협회는 만든 것입니다.
단적으로 이 독립문 추진 위원회 시기는 당시 정부 관료 중 외교적 역할을 하던 정동구락부 출신 인사들이 많았고, 1896년 5월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호전되는 반면 러시아와 조선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 때문에 대외적으로 독립을 밝힐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1896년 7월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를 기반으로 해서 독립협회를 창설, 회장에는 안경수, 위원장으로 이완용을 정합니다.
이 시기 이완용은 고종에 의해 촉망받는 신진 관료로, 미국 공사관 주재 경험을 갖춰 친미파로 간주되었고 춘생문 사건에도 개입해 고종의 신임도 두터웠고 백성들 사이에서 평판도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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