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시대의 위나라와 우리나라와도 교류가 있었을까요?
삼국지는 실화를 바탕으로 지은 세기의 소설인데요.
이런 삼국지 시대에 우리나라에 있는 나라도 있었을텐데요.
위나라와 접해있었을텐데요. 서로 교역이나 친선을 유지했었을까요?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기 237년에 동천왕은 신가인 명림어수와 일치인 착자·대고 등을 보내 수만 병력을 거느리고 양수(梁水)에 가서 공손연을 치도록 했다. 이때 위나라는 유주자사인 관구검에게 명령하여 역시 수만 병력을 거느리고 요하로 가도록 했다. 그러자 공손연은 곽흔·류포 등을 보내 고구려를 막고 비연·양조 등을 보내 위나라를 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위나라 군대가 패퇴하자 공손연은 연왕으로 자처하고 천자의 위엄을 갖추며 전력을 다해 고구려를 막았다.
이듬해에 위나라는 태위인 사마의에게 10만 병력을 지휘하도록 명령했다. 관구검이 요대(遼隊)를 쳐서 공손연의 수비 책임자인 비연·양조 등을 상대하는 사이에, 사마의는 북쪽으로 몰래 진군하여 공손연의 도읍인 양평을 기습적으로 포위했다. 공손연의 정예 병력이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해 죄다 양수에 나간 뒤라 양평이 텅 비어 있었을 때였다. 비연 등이 돌아와서 구원하려 했지만, 대패했다. 성 안에 포위되어 30여 일간 굶주린 공손연은 겹겹의 포위를 정면 돌파하려다가 붙들려서 참수를 당했다. 이렇게 해서 공손씨는 요동에 웅거한 지 3대 50년 만에 멸망했다.
이렇게 위나라가 공손씨를 손쉽게 멸망시킨 것은 고구려가 공손연의 후방을 견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삼국지》 〈동이 열전〉에는 “태위 사마선왕(사마의)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을 토벌하고, 위궁(산상왕)은 주부 대가를 파견하여 수천 명의 군사로 그의 군대를 돕도록 했다”고 적혀 있을 뿐이다. 〈명제 본기〉나 〈공손탁 열전〉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한 글자도 나오지 않는다. 이는 상내약외(詳內畧外)1)라는 중국 역사가들 특유의 필법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위나라가 사마선왕을 보내 공손연을 토벌하자, 왕(산상왕)은 주부 대가가 1천 명을 거느리고 그의 군대를 돕도록 했다”고 했다. 사마의를 사마선왕으로 부른 것을 보면, 이 기록이 《삼국지》 〈동이 열전〉을 그대로 베껴 쓴 것이 명백하다. 그런데 ‘수천 명’을 ‘1천 명’으로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와 그들의 역사에 관한 기록을 참고하여 이 문제를 위와 같이 정리하고자 한다.
위나라는 공손연을 멸망시키고 요동 전부를 굴복시킨 뒤, 고구려와의 맹약을 어기고 땅 한 덩어리도 고구려에 돌리지 않았다. 분노한 동천왕은 자주 병력을 동원하여 위나라를 토벌하고 서안평을 함락했다. 종래의 역사 기록에서는 압록강이 바다와 연결되는 입구에 서안평이 있었다고 했다. 이것은 《한서》 〈지리지〉에 근거한 것이다. 공손연의 전성기에 고구려와 오나라·위나라의 교류가 서안평을 통해 해로로 이루어졌으니, 이때의 서안평은 양수(梁水) 부근이라고 봐야 한다. 고대의 지명은 다른 데로 옮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출처 : 조선상고사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실제로 고구려와 위나라는 우호 관계를 유지했었습니다. 동천왕 때 사신을 보내 위나라와 화친을 했고, 연호를 바꾼 것에 대해서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고구려는 위나라 사마의가 동연을 멸망시키는 데 협력까지 했습니다. 고구려가 협력을 했으나 위나라가 보답을 하지 않자 고구려가 먼저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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