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말러는 염세주의 작곡자라는데...
그의 작품에 묻어나는 염세주의적 성향이 어째서 생겼는지 그의 일생에 대해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 말러의 작품을 좋아하는데, 그의 일생이 갑자기 궁금하네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구스타프 말러 (독일어: Gustav Mahler 1860년 7월 7일 ~ 1911년 5월 18일)는 보헤미아 태생의 후기 낭만파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작곡가로서 그는 19세기 오스트리아-독일 전통과 20세기 초의 현대주의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다. 지휘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확립되었지만, 그의 음악은 나치 시대 동안 유럽에서 공연 금지를 포함한 무관심의 기간 후에야 폭넓은 인기를 얻었다. 1945년 이후 새로운 음악 세대는 그의 음악을 재발견했다. 그 후 말러는 20세기의 작곡가들 중 가장 자주 연주되고 녹음된 작곡가 중 한 명이 되었다. 2016년 BBC 뮤직 매거진 151명의 지휘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그의 교향곡 중 3곡은 역대 최고의 교향곡 10위 안에 올랐다.[1]
보헤미아(당시 오스트리아 제국 일부)에서 독일어를 구사하는 유대인으로 태어난 말러는 어린 나이에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1878년 빈 음악원을 졸업한 뒤 유럽 오페라하우스에서 지휘직을 연이어 맡아 1897년 빈 국립 오페라 극장 감독으로 발탁됐다. 빈에서 10년 동안, 감독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한 말러는 반유대 언론의 적대와 비판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혁신적인 작품들과 공연 수준의 기준에 대한 고집은 특히 바그너,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의 지휘자로서의 그의 명성을 높였다. 후반기에는 잠시 동안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감독을 맡았다.
말러의 삶의 대부분은 지휘자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제한적이다. 그가 빈에서 학생이었을 때 작곡한 피아노 사중주곡과 같은 초기 작품들을 제외하고, 말러의 작품은 대부분 대형 관현악단, 교향악 합창단, 그리고 오페라의 솔로 연주자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 작품들은 초연 되었을 때 논란이 많았다. 예외로 그의 두 번째 교향곡 〈부활〉, 3번째 교향곡, 1910년 그의 8 번째 교향곡은 성공적이였다. 말러의 음악 후계자들 중에는 제2 비엔나 학교의 작곡가들, 특히 아르놀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이 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벤저민 브리튼 또한 말러에게 영향을 받은 20세기 후반의 작곡가들이다. 국제 구스타프 말러 협회는 작곡가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55년 설립되었다.
말러는 그의 생애 동안에는 위대한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 알려졌으나, 그는 사후에 후기 낭만파의 중요한 작곡가로 평가되었으며, 특히 교향곡과 가곡 (특히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와 〈죽은 아이를 위한 노래〉), 교향곡과 가곡의 두 성격을 띠는 《대지의 노래》가 유명하다.
그는 “교향곡은 하나의 세계와 같이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작곡하였고, 교향곡을 길이와 우주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시야 모두에 있어서 새로운 발전의 단계로 올려놓았다. 또한 말러는 베토벤의 영향을 받아 교향곡에 성악을 주입하는 시도를 하였다. (그의 《교향곡 3번》은 일반적인 교향곡 레퍼토리 중에서 가장 긴 약 100분 이상의 시간을 소요한다. 그의 《교향곡 8번》은 천 명이 넘는 연주자에 의해 초연되었으며 교향곡 중에 가장 거대한 오케스트레이션을 갖고 있다.) 그는 그의 교향곡 일부에 니체와 괴테의 철학, 중세 종교 상징주의와 영성을 표현하는 가사를 사용했다. 그의 작품은 이제 세계 주요 관현악단의 기본 레파토리의 일부가 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구스타프 말러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보헤미아의 칼리슈트 출생으로 부모는 유대인 상인이었으며 어린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10세때 피아노 리사이틀을 처음 열었고, 15세때 빈음악원에 입학하여 3년 후 졸업할 때까지 브루크너, 월프 등과 교제하여 그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877년부터 3년간 빈대학 철학과에서 역사와 음악사를 공부, 그 사이에 초기 작품인 피아노 5중주, 피아노와 바이올린소나타, 오페라 슈바벤의 에른스트공을 발표하나 파기되어 현존하지는 않습니다.
1880년부터 지휘활동을 시작했으며 1883년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의 파르시발에 접하여 크게 영향을 받았고 1888년 부다페스트 왕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 1891~1897년 함부르크 시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를 거치는 동안 작곡가로서의 명성도 얻었습니다.
1897년 빈 궁정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 임명되어 1908년까지 재직, 그 후 뉴욕에서 살았으나 1911년 심장병으로 지휘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빈으로 옮겨 거기서 사망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붉은메추리240님! 구스타프 말러의 일생은 그의 음악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염세주의적 성향은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 상황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구스타프 말러는 1860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헤미아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보헤미아 유태인 상인이었고, 가족은 빈곤한 상황에서 살았습니다. 어린 시절 동안 말러는 아버지의 폭력과 가족 내의 여러 참사,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직면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그의 음악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고, 그의 작품에서 염세주의적 요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인기: 말러는 성인이 되어서도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는 지속적인 건강 문제와 경력에서의 어려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의 고민을 겪었습니다. 그는 1901년에 결혼했지만, 그의 결혼생활은 복잡하고 어려웠습니다. 그의 아내 알마 말러는 여러 차례 외도를 했으며, 그들의 딸 둘 중 한 명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이런 개인적인 고난은 말러의 음악에 깊게 반영되었으며, 특히 그의 후기 교향곡에서 그렇습니다.
종교적 변화: 말러는 직업적 성공을 위해 1897년에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인 배경으로 인해 계속해서 차별을 겪었고, 이런 경험은 그의 음악에 우울한 톤을 더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모두 말러의 음악에 염세주의적 성향을 불어넣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종종 죽음, 신학적 의문, 인간의 고통 같은 주제를 다루며, 이런 주제들은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러의 음악은 동시에 생명력과 희망, 인간 정신의 내구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의 음악은 염세주의적인 데서만 그치지 않고, 인간의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