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의 진행과정과 결과에 대해 궁금합니다.
동학농민운동이 19세기후반~20세기 초반에 일본 식민지 억압과 대한제국의 이권침탈로 인해 형성된 대한민국 농민들의 저항운동이라고 하던데 동학농민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결과는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탐관오리의 수탈과 외세의 침턀이 심화되면서 동학의 교세는 더욱 확산됩니다. 이 상황에서 전라도 곡창 지대인 고부에서는 군수 조병갑의 비리와 학정이 매우 심하였습니다. 이에 1894년 1월 전봉준 등은 사발통문을 돌려 동지를 모은 다음 농민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습니다. 놀란 정부는 군수를 새로 임명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용태는 정부가 사교로 금지한 동학의 교도들이 봉기에 참여했다며, 농민 봉기 관련자들을 동학교도로 몰아 가혹하게 탄압하자 이에 농민의 분노가 다시 폭발하게 됩니다.
전봉준은 전라도에서 가장 큰 동학 교세를 이끌던 무장(전북 고창)의 손화중과 함께 농민군을 조직해 1894년 3월 다시한번 대규모로 봉기하였습니다. 이어 농민군의 4대 강령과‘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의내용이 담긴 백산 격문을 발표하고 농민군에는 동학교도보다 일반 농민이 더 많이 참여하게 되면서 탐관오리 제거, 조세 수탈 시정 등을 주장하였습니다. 농민군은 전주 감영에서 파견된 진압군을 황토현에서 물리치고, 이어 정부군을 남쪽으로 유인하면서 4월 하순에는 황룡촌 전투(전남 장성)에서 정부군을 크게 격파한 후, 기세를 몰아 전주성을 점령하습니다.
전주성 함락 소식에 놀란 정부는 청에 원병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의 상황을 주시하던 일본도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를 규정한 제물포 조약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해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였습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 농민군은 정부와 정치를 개혁할 것을 합의하는 전주 화약을 맺었습니다. 그 후 농민군은 전라도 각 지역에 자치적 민정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면서, 자신들이 내세운 폐정 개혁안을 실천해 나갑니다. 정부도 전주 화약을 체결한 후 교정청을 설치해 개혁을 추진하면서 청과 일본에게 철군을 요구하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청을 물리치고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자 조선 정부의 철병 요구를 거부하고 1894년 6월 무력으로 경복궁을 기습 점령해 조선 정부를 장악하고, 청·일 전쟁을 도발합니다. 이에 농민군은 반침략의 기치를 들고 1894년 9월남북접이 합세하여 봉기하였습니다. 논산에서 남·북접 연합 부대를형성한 후 서울을 향해 북상하였으나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농민군의 주력 부대는 공주 우금치에서 우세한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정부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크게 패하였습니다. 이후 끈질긴 항전을 벌였으나 결국 주요 지도자가 체포되면서 동학농민운동을 막을 내립니다.(1894. 12.)
동학 농민 운동을 반봉건, 반외세 운동을 갑오개혁에 반영되었으며, 농민군은 활빈당, 의병으로 이어져 항일 투쟁으로 계승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차 봉기는 고부 봉기로 뜻을 이루지 못한 전봉준과 그를 따른 동학교도들은 고부 인근인 고창군 무장현으로 피신, 이런 상황에서 이용태의 횡포가 심해지자 전봉준은 무장 지역의 손화중과 합심해 다시 수천명의 농민들을 모았고 1894년 3월 21일 최시형의 탄생일을 기해 궐기하게 됩니다. 이 사태를 접한 정부는 장위영 등의 군대를 파견하나 농민군은 황토재 승리에 이어 정읍, 흥덕, 고창, 영광, 함평, 장성, 나주, 장성, 태인, 부안 등에서 관군을 무찌른 것은 물론 삼남지방을 휩쓸며 전주성을 점령합니다.
그러나 전주성 점령 이후 관군과 농민군의 접전으로 양측은 큰 타격을 입으며 이즈음 조선 정부는 청에게 원군을 요청, 이에 그해 5월 5일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상륙, 이에 나라 안팎의 위급상황을 인지한 전봉준은 5월 8일 관군과 폐정개혁을 실시한다는 전주화약을 맺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톈진조약에 따른 청나라군의 개입을 빌미로 5월 6일 조선에 군대를 파견, 인천에 상륙하고 화약을 맺은 관군은 몇 부대를 전주에 남기고 철군, 동학농민군도 해산합니다. 그러나 군현의 행정이 혼란과 마비상태에 이르자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은 상의 끝에 호남지방의 각 군현에 농민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기로 했고 이때 12개 폐정개혁안을 내걸고 민정을 실시하는데 그 12개 항복은 다음과 같습니다.
-동학교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일소하고 서정에 협력
-탐관오리 엄벌
-횡포한 부호를 엄징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정벌
-노비문서 소각
- 천인에 대한 대우 개선
- 청상과부의 개가 허용
-무명잡세 일체 폐지
-관리 채용시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 등용
-왜와 통한 자는 엄징
- 기왕의 공사채를 무효로 할 것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
그러나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1차 봉기를 빌미로 조선에 입성한 일본군은 내정간섭을 강화한 데 이어 6월 2일 김홍집을 앞세운 친일내각을 설립,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을 강요합니다. 6월 21일 경복궁에 침입해 고종을 감금, 6월 23일 청, 일전쟁을 일으킨 후 25일에는 1차 갑오개혁을 강행합니다.
이러한 일본의 행태를 전해들은 전봉준은 일본군 척결을 위해 김학진과 손을 잡고 제 2차 기병을 준비, 9월 18일 삼례에서 집결해 서울로 향합니다 그리고 이는 반일 감정이 쌓여있던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등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확산되며 민중봉기가 확산되자 정부는 군을 출병시키고 일본에 출병을 요청,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합니다.
동학농민군은 치열한 접전을 펼치나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의 개입으로 고전하게 되고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 이후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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