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 참모장 출신 이범석은 왜 김구와 적대적이 되었나요?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고 김구가 발탁하여 임시정부의 한국 광복군 참모장이었던 이범석이 왜 이승만과 한편이 되어 김구 선생과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는지 배경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산리에서 성과를 올린 뒤 그는 따로 병력을 이끌고 갑산촌으로 이주, 새벽 2시 천수동 골짜기에서 19사단을 공격하고 포로로 잡힌 독립군을 구출, 마록구에서 2천명의 군사로 일본군을 상대, 한인 교포들이 탄환과 물자를 수송했고 90명의 독립군 전사자를 내고 수 백명의 일본군을 섬멸합니다.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 소식을 접한 이승만은 이후 매년 이범석과 서신 연락을 주고 받았고, 선물과 피복을 보냅니다.
1920년 이승만은 그에게 파커 만년필을 선물로 보내는데 '이제는 나도 전 세계를 향해 자랑할 밑천을 얻었소, 청산리 전투의 대승리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외교를 펼칠수있는 중요한 선전자료를 얻게 된 것이요. 청사에 길이 빛날 대첩을 이곳 동포들과 함께 충심으로 축하하는 바이오.' 라며 격려합니다.
1921년 1월 26일 간도참변의 참화를 피해 홍범도, 서일 지청천,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러시아령 이만에 도착, 이 연합부대는 러시아로 넘어오기 직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서일의 북로군정서, 신흥학교 교관 지청천, 광복단 등 몇 개의 부대가 모인 것으로 이범석도 이들을 따라 만주로 갑니다.
2월 말 이들은 다시 아물주 자유시로 옮기고 새 무기를 받는다는 러시아 측의 약속 하에 생명과도 같은 무기를 죄다 반납, 러시아행을 탐탁해 하지 앟던 김좌진, 김규식, 이범석은 함께 가지 않고 되돌아오면서 자유시 참변의 화를 면하게 됩니다.
1921년 이승만은 그에게 서신으로 연락하며 이후 이승만은 그에게 유럽과 미국에 대외 선전, 홍보를 위한 자료를 요청하고 이범석은 자료를 미국의 구미위원부로 발송, 이승만은 그에게 계속 군사 자금과 독립군을 위한 피복과 가죽 옷을 발송, 이범석의 이동 후에도 서신연락으로 소재지로 격려 편지와 군 자금, 선물을 계속 보냅니다. 이승만의 계속된 후원과 편지에 감격받은 그는 후에 그를 돕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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