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 김만중의 구운몽에 대해 궁금한게 있어서요.
예전에 김만중이 지은 소설 구운몽을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는데요. 문득 궁금한점이 생겨서요. 구운몽의 시대적 배경이 언제인가요? 그리고 구운몽이 발표되었을 당시 사회적 반응은 어땠는지 궁금해요. 아울러 구운몽과 관련된 역사적인 자료가 현존하는게 있는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후기인 1687년에 서포 김만중이 집필한 고전소설. 한국 양반소설의 대표 주자로,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조신의 꿈'의 기본 틀을 활용하여 스토리를 확장한 소설이다.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조설근의 대작 소설 《홍루몽》과 비슷한 줄거리 형식을 지니고 있는 소설인데, 시기 상으로만 보자면 1740년에 쓰인 《홍루몽》보다 1687년에 쓰인 《구운몽》이 더 앞선다. 그렇기에 일각에서는 《홍루몽》이 청나라에 수출된 《구운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지적하기도 한다.김만중은 노론 벌열층(閥閱層)의 일원이라는 자신의 처지에 어울리지 않게 당시로서는 이단시되던 불교나 패서(稗書) 등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러한 점이 소설을 지을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
작자의 종손인 김춘택(金春澤)은 김만중이 속언(俗言)으로 많은 소설을 지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남정기(南征記)」만 뚜렷이 남아 있을 뿐이다.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된 김만중이 중국소설을 사오라 한 어머니의 부탁을 잊어버려 돌어오는 길에 부랴부랴 이 작품을 지어 드렸다는 이야기가 그의 집안에서 전해지고 있다. 이 경우에도 어머니를 위하여 속성으로 지었다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이규경은 특히 이 작품이 김만중이 귀양갔을 때 지어졌다고 하였는데,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즉 그가 장희빈(張嬉嬪)의 아들 이윤(李昀)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다 선천에 귀양간 숙종 14년(1688)인지, 아니면 장희빈이 인현왕후(仁顯王后) 대신 왕후로 책봉된 기사환국으로 숙종 15년에 남해로 귀양갔을 때인지가 확실하지 않다.
구운몽」을 비교문학적 시각에서 다룬 연구로는 정규복의 업적이 대표적이다. 「구운몽」에 나타나는 환몽구조(幻夢構造)의 가장 오래된 것은 인도에서 형성된 ‘사라나비구(娑羅那比丘)’(雜寶藏經)이다. 이것이 육조시대에 중국에 들어와 당나라 때에 나온 「침중기(枕中記)」·「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앵도청의(櫻桃靑衣)」 등과 같은 전기소설(傳奇小說)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 작품이 다시 우리나라에 수용되어 「구운몽」 창작의 배경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구운몽」은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시대[明治時代]에 고미야마[小宮山天香]에 의하여 「무겐[夢幻]」으로 번안되기도 하였다. 즉 환몽구조는 인도에서 중국·한국·일본으로 전파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나무위키 구운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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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성진이 용왕에게 갔다오는 중에 위부인의 메시지를 받아 육관대사에게 전달합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팔션녀들은 문득 근처에서 간단히 봄놀이를 가기로 하고. 원래 형산 전체가 자기들이 놀러다니는 곳이었는데,
노는 중에 돌다리에서 술에 거나하게 취한 성진을 만나는데, 선녀들은 다리를 지니가려는 성진에게 "예기에 남자는 우측통행, 여자는 좌측통행이라던데 길이 좁아서 저희가 비켜드릴 수 있겠어요? 다른 데로 가시죠"라는 수작을 걸고, 성진은 결국 길을 지나가고자 신통력을 꺼내써 꽃을 진주로 만들어 나눠주는 수작질을 하고 만다. 이 일이 걸려 성진이 황건역사의 손에 이끌려 염라대왕 앞으로 갔을 때, 팔선녀들도 같이 벌을 받게
됩니다
구운몽은 가상 세계를 바탕으로
쓴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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