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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gus815
eogus81523.06.07

개화기 서양음악에 대해서 질문드립니다.

개화기, 일제강점기 때부터 서양음악이 국내에 들어왔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 당시 사람들에게 서양음악이 끼친 영향이 무엇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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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7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양음악의 수용은 1885년 기독교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 포교를 시작하면서 그들이 가르친 찬송가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한국음악사를 살펴보면, 삼국시대에 서역으로부터 유입된 공후(箜篌)라는 악기가 고대 이집트의 악기와 관련있는 것이라든지, 고려시대에는 원나라를 통하여 서양악기의 존재가 고려에 알려졌다는 기록이 있어 서양음악과의 접촉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면 청나라와의 빈번한 문화교류 및 실학자들의 왕래를 통하여 서양음악과의 접촉은 더욱 구체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를 들면, 홍대용(洪大容) · 박지원(朴趾源) 등 대표적인 실학자들은 그들이 북경(北京)에서 보고 온 오르간 등의 악기를 그들의 저술에 상세한 기록으로 남기고 있으며, 이덕무(李德懋)는 그의 저서인 『 청장관전서』에서 ‘서양음악의 원리약설(原理略說) (1795)’을, 이규경은 『 오주연문장전산고』와 『 구라철사금자보』에서 서양음악의 조와 음계, 음의 고저장단 등을 상술하였습니다.


    특히, 이 무렵에는 양금(洋琴, dulcimer)이 우리 나라에 소개되어 전통음악의 편성에 수용되는데, 이 과정에서는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박지원 · 홍대용 등의 실학자들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였고, 이덕무 · 이규경 등은 이 악기의 사용법과 악보 등에 대한 기록을 남김으로써 양악기의 한국적 수용에 지대한 공을 남겼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 후기부터 서양악기 및 이론이 우리 나라에 소개되면서 점차 서양음악에 대한 접촉이 빈번해지는 가운데 1885년에는 찬송가를 통한 서양 기독교음악이 들어오게 됩니다.


    감리교 선교사인 미국인 아펜젤러와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 성경과 찬송가로 포교를 하고 이것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노래들은 1886년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배재학당에서 ‘창가(唱歌)’라는 과목으로 책정되어 교육되었고, 1893년에는 언더우드에 의하여 『찬양가』가, 1896년과 1897년에는 감리교회에서 각각 『찬미가』와 『찬송시』가 발행되었습니다.


    당시의 이 출판물들은 악보 없는 가사집의 형태였는데, 우리 나라에서 악보에 의한 찬송가가 출판된 것은 1905년에서 1908년 사이에 제작된 『합동찬송가』였습니다.


    이와 같은 찬송가의 출현은 전통적인 노래의 패턴과는 다른 새로운 것으로서, 신학문교육기관의 성장과 함께 점점 그 바탕을 넓혀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이후로는 새로운 노래를 위한 가사를 찬송가식의 곡조에 맞추어 부르는 것이 성행하게 됨에 따라 찬송가의 여파는 단순히 기독교 포교를 위한 음악으로서의 기능 이외에 한국의 신음악(新音樂)이라는 의미까지 지니게 되었습니다.


    서양음악 수용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던 또 하나의 주체는 서양식 군악대 창설입니다. 1896년 전권특명대사 자격으로 러시아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온 민영환(閔泳煥)이 군악대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서양식 군악대 창설계획이 수립되자 당시 독일공사 바이파르트(Weipart)는 한국 양악대의 지도자로 그 무렵 일본 해군군악대를 지도하고 있던 독일인 에케르트(Eckert,F.)를 추천하였고, 1901년 2월 에케르트의 도착과 함께 양악대 창설에 필요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에케르트는 작곡가인 동시에 오보에 연주자로서 독일의 프러시아 왕국의 궁정악장을 역임한 바 있는 드레스덴음악학교 출신의 유능한 음악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에케르트는 이미 일본에서 군악대를 지휘한 경험까지 갖추고 있어, 그의 탁월한 지도력에 힘입은 서양식 군악대는 매우 빠른 성장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군의 의식은 물론 정부의 각종 의식에서 음악을 담당하였고, 이 밖에 시민을 위한 연주회를 파고다공원에서 갖는 등 서양의 군악 및 국가 · 국민가요, 서구의 행진곡 등을 우리 나라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약 10여년간 의욕적인 활동을 벌여온 서양식 군악대는 1910년 경술국치와 동시에 이왕직양악대(李王職洋樂隊)로 개편되었습니다.


    에케르트가 죽은(1916) 뒤 백우용(白禹鏞)이 그 뒤를 이어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왕직양악대는 해체되고, 1919년 경성양악대로 계승되었으나 결국 변화를 겪으면서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비록 이들의 활동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으나, 서양식 양악대의 설립 및 그들의 활동이 초창기 서양음악 수용에 미친 영향은 이를 모체로 한 민간에서의 양악활동이 그 영역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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