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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고릴라5
까칠한고릴라523.04.13

황산벌의 계백이 역사적으로 어떠하였는지 궁금합니다.

100인의 위인 노래에서 황산벌의 계백이라는 가사가 있는데요. 황산벌 전투는 김유신이 더 유명한거 아닌가싶어서요. 계백장군이 황산벌에서 어떠해서 위인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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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1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60년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만 대군은 백제를 공격했고 백제의 계백 장군은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신라군과 싸웠습니다.

    계백 장군은 아마도 패전을 예감했는지 전쟁 나가기 전에 자신의 가족들을 다 죽였다고 합니다.

    황산벌의 위치는 지금의 연산입니다.

    당시 계백 장군은 옛날에 월나라 구천이 5000으로 오나라 부차의 70만 대군을 이겼다며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정신력에 있다고 군사들을 독려했습니다.

    그 결과 백제군은 용감하게 싸워 10배나 넘는 신라군을 4번이나 이겼습니다. 이에 사기가 크게 떨어진 신라군을 독려하기 위해서 화랑인 반굴이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고 반굴의 친구인 관창도 백제 진영으로 쳐들어가 용감하게 싸웠는데 계백 장군은 관창이 너무 어린 것을 보고 살려 주었다고합니다.

    그러나 계속 공격해 오자 관창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달아서 신라 진영으로 보냈는데 이를 본 신라군들은 두 화랑의 용기에 감명받아 용감하게 싸우자 숫적으로 절대 열세였던 백제군은 밀리기 시작했지요.

    계백 장군은 의자왕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당나라 병사들의 공격을 막기에 바빴던 백제는 소수의 원군만 보내서 결국 계백 장군과 백제의 5000 병력은 모두 전사하고 이 전투에서 패한 백제는 결국 망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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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백제는 여러방면에서 신라에 공격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주도권은 신라로 빼앗기고

    많은 땅을 빼앗겼습니다. 즉위 초 용맹했고 지략이 뛰어났던 의자왕은 이제 그 총기가 다했고

    자신감이 떨어진 상태였으며 충신의 말을 귀 닮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의자왕도 이제 방도가 보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이때 660년 신라는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삼한일통의 과업을 이루기 위해 당군과 동맹을 맺고

    사비성으로 진격합니다. 이때 신라가 동원한 정예병은 5만 정도(당시 화랑도의 정신이 충만했던 시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백제로서는 신라의 5만 군대도 막기 어려운데 당의 소정방이 이끄는 대군도 상대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지요. 그러한 백제를 위해 마지막까지 싸운 장군이 계백 장군입니다. 백제에 남은 군사를 다끌어 모아

    일부를 당의 군대를 막기위해 남겨 놓고 자신은 5천의 결사대를 끌고 황산벌에 진을 칩니다. 계백 장군의 마음은 어떠한 심정 이었을까요

    10배의 신라군을 맞이하여 계백의 백제군은 용맹하게 싸우고 신라군을 번번히 격퇴 시킵니다. 정말 대단한 일이었지요.

    백제의 마지막 불씨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계백장군이 대단한 것이고 끝까지 나라를 위한 충정,

    절박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투지 등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부분이 많아서 우리는 계백 장군을 위인으로 생각하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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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황산벌에 도착한 계백은 병사들을 독촉했고, 이에 백제 군사는 사기가 올라 네 번의 소전투에서 신라군을 막아내었다.그러자 김유신의 동생 김흥순 아들 반굴(盤屈)이 전장에 투입되어 1인 돌격 전술을 구사하니, 반굴은 백제 병사들을 여럿 죽이고 자신도 전사했다고 합니다. 승기를 탄 신라군은 김유신의 조카인 좌장군 김품일 16세의 아들 관창(官昌)에게 반굴을 따르게 하였다고 합니다. 관창은 갑옷을 입힌 말을 타고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적진으로 달려 가서 힘껏 싸우다가 적에게 사로잡히고 계백에게 끌려갔고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였는데, 그 나이가 어리고 용감함에 감탄하며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장정들이랴!”라 하고 살려서 보내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신라 정예군 진영으로 돌아간 관창은 품일에게 간단한 인사만 하고 다시 돌격하였고, 계백은 백제 병사들을 계속 죽인 관창의 목을 베었다고 합니다. 화랑 관창의 죽음으로 신라군은 백제군보다 더욱 죽을 각오로 싸웠고, 결국 백제군은 전멸하고 계백도 전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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