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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산파라는 종파는 어떤 단체인가요?

안녕하세요.

'가지산파'라고 하는 종파는 어떤 단체,모임인가요?

가지산파가 생겨나게 된 시기와 대표인물은 누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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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의

      신라 말에 형성된 선종의 한 산문.


      산문의 형성 배경

      선종은 당 불교계에서 8세기 후반에 마조 도일(馬祖道一)과 석두 희천(石頭希遷)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부각되었고, 그들의 문도들이 번창하면서 점차 독립된 교단으로 형성되었다. 본래 선종의 수행자는 각지를 다니면서 몇 사람의 스승에게 배웠으며, 인가를 받은 후에도 선지식을 계속해서 찾는 경우가 많았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 사제 관계 인식을 달리하는 경우도 존재하였다. 그러나 전등사서(傳燈史書)가 편찬되면서 선승을 배타적으로 한 사람의 스승에 연결하는 경향이 확대되었고, 선종 특유의 법통설에 입각한 법계의식이 고양되었으며, 어느 사원이 특정 일파에 의해 계승되는 경향이 점차 확산되었다.


      선종이 갖는 이러한 특성과 함께 9세기 중반 당의 회창(會昌) 폐불을 계기로 입당 유학승들이 신라로 돌아오면서 특정 개산 조사의 법통을 계승한 문도들이 특정한 사찰을 중심으로 한 산문을 지역에서 형성하였다. 선사들은 거주한 사원 단위로 각각 세력을 이루면서 서로 연결된 산문으로 성장하였다.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제자들이 특정 사원을 중심으로 대집단을 이루었다. 나아가 산문은 왕실, 중앙귀족, 호족의 후원을 받아 본사를 중심으로 곳곳에 장사를 두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었다.


      개창조

      가지산문의 개창조인 도의(道義)는 784년(선덕왕 5)에 당에 유학하였다.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기도 하였으나 중국 선종의 육조(六祖) 혜능(惠能)이 선을 펼쳤던 보단사(寶檀寺)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조계산 보림사(寶林寺)의 육조영당(六祖影堂)을 참배하였다. 이후 그는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에 가서 서당 지장(西堂智藏)의 법을 이었으며, 백장 회해(百丈懷海)에게도 인가를 받았다. 이후 도의는 821년(헌덕왕 13)에 신라에 돌아왔으나 당시 불교계에서 그의 선 사상이 수용되지 못하자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역사적 변천

      도의의 법통은 염거(廉居, ?~844)에게 계승되었으며, 염거는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선풍을 확산시켰다. 염거의 문하에는 홍각선사(弘覺禪師) 이관(利觀)과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4~880)이 대표적인 인물로 활동하였다. 이관은 봉림산문의 원감대사(圓鑑大師) 현욱(玄昱)의 문하에서 수학한 적이 있는데, 억성사에 머물면서 헌강왕의 초청을 받아 설법하였다.


      체징은 18세에 출가하여 처음에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그는 억성사의 염거를 찾아가 선법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또한, 체징은 837년(희강왕 2)에 당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3년간 각지의 선사들을 찾아다녔다. 840년(문성왕 2)에 신라로 돌아온 체징은 20여 년간 억성사, 고향 인근의 사찰 등에 머물다가 859년(헌안왕 3)에 무주(武州) 황학난야(黃壑蘭若)로 옮겼으며, 다시 헌안왕의 명으로 전남 장흥의 가지산 보림사(寶林寺)로 이동하였다. 체징이 보림사에 주석하면서 가지산문은 왕실과 진골귀족의 후원을 받으면서 세력을 확대하였다. 보림사는 본래 원표(元表) 대덕이 창건한 화엄종 사찰이었지만, 체징이 입적하면서 헌강왕에게 ‘보림사’라는 사호를 받았다. 보림사는 본래 중국 선종의 개창자인 육조 혜능이 주석하던 절의 이름과 같으므로 신라 선종의 권위를 지닌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김언경이 개인 재산을 내어 철 2,500근으로 비로자나불을 주조하였고, 망수택(望水宅) ·이남택(里南宅) 등이 금 160분(分)과 조 2,000곡(斛)을 내어 절을 장식하는 비용에 충당하였다. 따라서 가지산파의 초기 형성과정에서 신라 왕실과 중앙귀족의 후원이 적지 않았다.


      체징의 문도는 영혜(英惠), 청환(淸奐) 등 800여 명이 있지만, 강진 무위사에서 활동한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로 계승되었다. 형미는 891년(진성여왕 5)에 당에 유학하여 운거 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이었으며, 905년(효공왕 9)에 신라로 돌아왔다. 이후 형미는 왕건의 귀의를 받았지만, 궁예에게는 박해받았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지산문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선종은 8세기 말 혜공왕 때의 신행(神行)과 9세기 초인 헌덕왕 때의 도의(道義)에 의하여 가지산파(迦智山派)가 성립되면서 9개파가 성립되었다. 선종은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을 거듭했던 하대에 심성(心性) 도야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시대적 환경에 부합될 수 있었다. 대개 6두품 출신이 지방 호족들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한 변경에서 개창되었기 때문에 호족의 종교로 발전하였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성립된 선종 구산의 하나이며 본산은 전남 장흥군 유치면에 있는 가지산 보림사 입니다.

      가지산파의 개산조 도의는 당나라로 건너가 지장의 법을 받고 821년 귀국합니다 . 신라에 돌아온 그는 당시의 사람들이 선법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설악산으로 들어가 진전사에 은거하면서 제자를 가르쳐 염거에게 법을 전했으며 염거는 설악산의 억성사에 오래 머물렀으며 체징에게 법을 전했고 체징은 837년 당나라로 건너가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선사들을 만나보았으나 도의가 물려준 법 밖에 따로 더 구할것이 없음을 깨닫고 840년 귀국해 보림사를 세우고 형철 등 800여명의 제자를 배출해 가지산의 한 선파를 이루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가지산파는 불교인데요. 신라 말기 ~ 고려 초기에 성립된 선종 구산 종파 중의 하나로 알고있습니다.

      가지산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염거(廉居) 스님이 있습니다. 염거 스님은 가지산파의 2대 조사로서, 통일신라의 승려였습니다. 염거는 주로 설악산 '억성사'에 머무르면서 선법의 홍포라는 지역에 주로머무르며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항상 일심을 강조하며 삼계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는데요. 당시 시대는 불교에서 이 선법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기에 홀로 수행하며 살아가다, 체징이란 인물에게 법맥을 전하고 가지산파를 대성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후에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선종은 당 불교계에서 8세기 후반에 마조 도일(馬祖道一)과 석두 희천(石頭希遷)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부각되었고, 그들의 문도들이 번창하면서 점차 독립된 교단으로 형성되었습니다.


      본래 선종의 수행자는 각지를 다니면서 몇 사람의 스승에게 배웠으며, 인가를 받은 후에도 선지식을 계속해서 찾는 경우가 많았고, 스승과 제자 사이에 사제 관계 인식을 달리하는 경우도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등사서(傳燈史書)가 편찬되면서 선승을 배타적으로 한 사람의 스승에 연결하는 경향이 확대되었고, 선종 특유의 법통설에 입각한 법계의식이 고양되었으며, 어느 사원이 특정 일파에 의해 계승되는 경향이 점차 확산되었습니다.


      선종이 갖는 이러한 특성과 함께 9세기 중반 당의 회창(會昌) 폐불을 계기로 입당 유학승들이 신라로 돌아오면서 특정 개산 조사의 법통을 계승한 문도들이 특정한 사찰을 중심으로 한 산문을 지역에서 형성하였습니다.


      선사들은 거주한 사원 단위로 각각 세력을 이루면서 서로 연결된 산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제자들이 특정 사원을 중심으로 대집단을 이루었습니다. 나아가 산문은 왕실, 중앙귀족, 호족의 후원을 받아 본사를 중심으로 곳곳에 장사를 두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었습니다.


      가지산문의 개창조인 도의(道義)는 784년(선덕왕 5)에 당에 유학하였습니다.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기도 하였으나 중국 선종의 육조(六祖) 혜능(惠能)이 선을 펼쳤던 보단사(寶檀寺)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조계산 보림사(寶林寺)의 육조영당(六祖影堂)을 참배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에 가서 서당 지장(西堂智藏)의 법을 이었으며, 백장 회해(百丈懷海)에게도 인가를 받았습니다. 이후 도의는 821년(헌덕왕 13)에 신라에 돌아왔으나 당시 불교계에서 그의 선 사상이 수용되지 못하자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가지산문(迦智山門) 또는 가지산파(迦智山派)는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성립된 선종 구산의 하나이다. 본산은 전남 장흥군 유치면에 있는 가지산 보림사(寶林寺)이다.

      -출처:위키백과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라 말에 형성된 선종의 한 산문.가지산문의 개창조인 도의(道義)는 784년(선덕왕 5)에 당에 유학하였다.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기도 하였으나 중국 선종의 육조(六祖) 혜능(惠能)이 선을 펼쳤던 보단사(寶檀寺)에서 구족계주3를 받았고, 조계산 보림사(寶林寺)의 육조영당(六祖影堂)을 참배하였다.

      이후 그는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에 가서 서당 지장(西堂智藏)의 법을 이었으며, 백장 회해(百丈懷海)에게도 인가를 받았다. 이후 도의는 821년(헌덕왕 13)에 신라에 돌아왔으나 당시 불교계에서 그의 선 사상이 수용되지 못하자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주4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