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흔히 의자왕 하면 삼천궁녀를 떠올리지만, 삼천궁녀는 진짜 삼천명의 궁녀를 거느렸다는 게 아니라 문학적인 수사에 불과합니다. 애당초 삼천궁녀가 처음으로 언급되는 것도 조선 초기에 와서의 일이며, 삼국사기에는 낙화암에 대해 아예 언급이 없고 삼국유사에서도 단지 의자왕과 후궁들이 뛰어내렸다는 이야기가 있을 뿐입니다. 조선 시대의 문인들이 낙화암과 백제를 소재로 한 글을 쓰면서 '백제가 멸망하면서 삼천궁녀들이 이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었구나'와 같은 표현을 남긴 사례가 많습니다. 여기서 '삼천'이라는 것은 그냥 많은 수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7세기 때의 백제에 삼천명의 궁녀가 나오기도 힘들죠. 이보다 훨씬 후대의 고려왕조의 막장왕이었던 충혜왕이 전국의 미녀란 미녀를 다 긁어 모아서 100명이 넘는 궁녀를 모았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조선왕조에서도 궁녀가 가장 많았던 게 연산군 시절인데 그때도 1,000명만 살짝 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 이외에는 조선왕조는 궁녀숫자를 600명 정도를 유지해왔습니다. 그런데 그 고려, 조선보다도 인구가 더 적었던 백제가 이렇게 많은 궁녀를 데리고 있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