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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철한불독44
냉철한불독4423.09.26

1948년 제주 4.3사건은 어떻게 전개되었나요?

1948년 제주 4.3사건은 어떻게 전개되었나요? 사건이 발생한 배경과 사건 경과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사건 당시 제주 사회와 정치적인 상황은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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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4.3사건은 1947년 3월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입니다.

    군경은 4월 3일의 무장반란을 선동으로 인한 무장폭동으로 규정했고

    4월5일 미군정은 제주경찰 감찰청 내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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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 마당에서 열린 삼일절 28돌 기념집회에 참석한 시위 군중을 향해 경찰이 발포하면서 민간인 6명이 희생당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이에 3월5일 제주도 3.1사건대책 남로당 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민, 관 합동 총파업이 단행되는데 이 파업에는 3월 13일까지 166개 기관단체의 4만 1211명이 참여, 미 군정은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로 지목해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으며 본토에서는 응원경찰을 대거 파견하고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단원들까지 제주에 들어와 곳곳을 장악합니다.

    이들은 파업 주도 세력 등 약 2500명을 무더기로 검거, 고문한 뒤 이 가운데 250여 명을 재판에 회부 , 이로인해 총파업은 3월 18일 종식되나 미군정은 제주도 군정장관 등 고위관리들을 극우 성향의 인물들도 교체해 나가는 등 강경책을 지속합니다.

    그러자 분노한 도민들은 국우파 암살을 요구하는 전단을 살포, 미군 축출과 경찰 타도 등을 외치기 시작했고 이에 미군정은 1947년 8월 15일을 기해 다시 도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 이를 치하기 위해 도민들과 도민 지도자들은 한라산으로 모여들게 됩니다.

    당시 미국은 남쪽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 유엔은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결정, 이에 좌파 세력은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하면서 전국적으로 2.7투쟁을 전개, 미 군정은 당시 반미 감정이 높았던 제주도민에 대해 집중적인 공세를 가합니다.

    1948년 4월 3일 자정 무장항쟁이 시작되는데 제주도민의 무장전위대인 자위대 약 350여명은 도내 20여개의 경찰지서 중 11여 개의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숙사 및 국민회, 독립촉성회,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과 관공리의 집을 공격합니다.

    초기 공세에 성공을 거둔 무장세력은 곧 도민과의 협력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직 개편을 단행, 자위대를 해체하고 각 면에서 30명씩 선발해 연대와 소대로 구분 편성된 인민유격대를 조직했습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군정은 9연대에 진압작전 출동을 명령하는 등 병력을 증강, 부산 등 타 도로부터 차출한 1700여명의 경찰을 파견, 제 9연대장인 김익렬에게 강경 진압을 명령하나 김익렬이 이를 거부하자 유격대와 협상을 명령, 그 결과 4월 28일 김익렬과 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대좌해 72시간 내 전투 중지에 합의하기에 이르렀으나 미 군정장관 윌리엄 딘은 평화협상을 거부한 것은 물론 방화사건 등 제주도 내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련의 사건들을 유격대의 소행이라고 조작했고 사건의 책임을 9연대와 김익렬에게 물어 김익렬을 해임, 강경파인 박진경을 기용해 강경 작전을 준비합니다.

    유격대와 제주도민들은 5.10총선거를 거부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고 그 결과 제주도 북제주군 갑구, 북제주군 을구 등 2개 선거구과 과반수 투표미달로 선거가 무효화되었고 이때 전국 투표율이 94.9%였으나 제주도 전체 투표율은 62.8%에 그칩니다.

    이를 미군정은 이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저해하는 불순 세력의 음모로 판단, 6.23재선거를 시도하나 이마저도 실패,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나 정부 수립 이후에도 군 작전지휘권은 미군에 귀속되어있었고 수도관구경찰청 소속 경찰관 800명이 제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해 10월 11일 정부는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 해안에서 5km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대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 이때부터 군경토벌대는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학살하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 그해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중산간마을은 물론 소개령에 의해 해안마을로 내려간 주민들까지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했습니다.

    제주 4.3사건 희생자 대부분은 이 초토화작전이 전개된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 까지 약 5개월동안 발생했습니다.

    1949년 3월 산에서 내려와 귀순하면 과거 행적을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는 선무공작이 전개되며 한라산에 피힌해 있던 1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하산이 시작되었고 당시 하산한 이들의 대부분은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들이었는데 여성만 51%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이 방침은 지켜지지 않았고 토벌대는 하산민 가운데 유격대 협력자를 가려내는 색출 작업을 벌여 1660명을 군법회의에 회부, 이 군법회의는 법이 정한 최소한의 절차도 밟지 않았고 판결문도 없는 상태에서 사형, 무기형, 징역 15년 형 등 중형을 선고, 이때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제주비행장에서 총살, 나머지 형을 받은 사람들은 제주도에 형무소가 없어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보내졌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며 이승만 정부가 전쟁 직후 전국의 형무소 수감자와 예비검속자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학살을 벌였고 이때 육지 형무소에 수감되어있던 4.3 수형자들은 정치범이란 이유로 불법 처형되었으며 제주도 내 4개 경찰서에 구금된 예비검속자들도 대거 학살되었습니다.

    이후 1952년 제주도경찰국은 100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해 한라산 기슭 곳곳에서 무장대에 대한 토벌전을 벌였고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되며 제주 4.3사건은 7년 7개월만에 끝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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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해서 남로당이 주도하는 격렬한 데모가 일어나고 북에서 온 서북청년단과 경찰 군인들이 제주도민 30만 중 8만5천이 죽거나 다친 근현대사의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습니다. 총맞아 죽거나 죽창으로 찔려죽거나 교회안에 가둬두고 불을 질러죽이는 등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제주도에서 일어난겁니다. 2000년 1월 제정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제주 4.3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했습니다. 2014년 1월 17일 박근혜정부는 국무회의를 통해 4월 3일을 제주 4.3사건 희생자 추념일로 입법하여 국가기념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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