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청나라로부터 랴오둥반도 등지를 할양받으나 1895년 5월 일본의 독주를 우려한 열강들인 러시아가 주동하고 프랑스, 독일이 연합한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반환,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인한 조선 측에서 러시아에 접근합니다.
그동안 친일 세력에 눌려있던 명성황후 척족 세력과 함께 유럽, 미국 공관과 밀접한 접촉을 가지며 친미, 친러적 경향을 보이던 정동파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 러시아공사 베베르 역시 미국공사와 재한 미국인을 포섭하고 명성황후 세력에 접근해 친러 정책의 실시를 권유합니다.
이에 친일 세력은 급격히 세력을 상실하며 김홍집 내각이 붕괴, 일본공사 이노우에의 매수정책에 따라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나 명성황후 세력과 친미, 친러파가 요직을 장악하게 되면서 일본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개혁 사업을 폐지하고 친일파를 축출하게 됩니다.
또 일본에 의해 육성된 훈련대마저 해산당할 위기에 처하자 신임 일본공사 미우라는 1895년 10월 8일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침입시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 결과 세력을 만회한 일본은 친일 내각을 성립시켜 단발령 실시를 포함한 급진적인 개혁 사업을 재개하나 왕비 시해와 단발령은 전국에 걸친 의병봉기를 초래하게 됩니다.
전국에 걸쳐 의병이 일어나자 김홍집 내각은 지방의 진위대를 이용해 의병을 진압하고자 하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중앙의 친위대병력까지 동원해 수도 경비에 공백이 생기고 이 기회를 틈타 친러파 측은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자 모의합니다.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시키려는 시도는 1895년 11월 28일 춘생문 사건에서도 있었는데 이재순, 임최수 등은 계획을 세워 고종의 승인을 받고 김홍집 내각에 불만을 가졌던 구 시위대 장교들을 거사에 동원합니다.
현흥택은 미국, 러시아공사의 협조를 얻어 고종을 파천하려는 계획을 진행, 이 사건은 사전에 발각되 실패했으나 당시 가담한 정치세력은 아관파천에 결집하게됩니다.
을미사변 후 러시아공사관에 은신했던 이범진은 이완용, 이윤용 등과 함께 고종의 파천 계획을 모의, 을미사변 후 고종이 총애했던 엄 상궁을 통해 내각이 일본 측과 함께 고종의 폐위를 꾀하고 있다고 하는 서한을 고종에게 전달합니다.
이로써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는 명분을 세워 고종의 결단을 유도, 이들은 가마를 이용한 파천방법, 러시아 경비병의 동원, 외국공사관의 지지와 승인을 위한 외교활동, 파천 실패 시 무력으로 동원할 보부상의 소집 등 사전 준비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