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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진 삼계탕
기름진 삼계탕23.06.20

보도연맹사건으로 이승만이 학살한 한국인

보도연맹사건검색해보면 사망 추정자가 20~120만명이라고 하는데

경상도에서 사망자가 가장많은 이유가 뭔가요 제주 43사건은 3~5만명이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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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민보도연맹이란 단체는 원래 좌익이었던 인물들이 우익으로 전향해서 1949년에 조직한 반공단체입니다. 근데 이후 1950년에 6.25 전쟁이 터졌고,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이 단체에 가입한 사람들은 원래 좌익이었으니 혹시라도 북한과 내응하여 북한 인민군에게 협조를 할까 우려하였고 결국 국군과 경찰은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에 이른것입니다.

    보도연맹은 1949년 6월 5일 좌파전향자로 구성되어진 반공단체 조직이며, 정식 명칭은 국민보도연맹이었다.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결성되었다. 대한민국정부 절대 지지, 북한정권 절대 반대, 인류의 자유와 민족성을 무시하는 공산주의사상 배격 ·분쇄, 남로당,조선 로동당 파괴정책 폭로,분쇄, 민족진영 각 정당,사회단체와 협력해 총력을 결집한다는 내용을 주요 강령으로 삼았었다.

    국가보안법의 시행에 따라 1949년 말에는 가입자 수가 30만 명에 달했고, 서울만해도 거의 2만 명에 이르렀다. 주로 좌파사상적 낙인이 찍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고, 거의 강제적이었으며, 지역별 할당제가 있어 사상범이 아닌 경우에도 등록되는 경우가 많았다. 선우종원 당시 치안검사의 증언에 따르면, 연맹원 모집은 주로 좌파 경험이 있는 자들이나, 사상범(양심수)을 대상으로 하였다고 하나, 이와 관련된 증언은 엇갈리고 있으며, 내무부(당시 내무부장 장석윤)가 관련이 된 실질적인 관제조직이었다.

    1950년 6월 25일북한이 남침하면서 (좌파인사들에 대한 사상 개조 단체였던) 보도연맹이나 양심수북한과 내응하고 뒤에서 배신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우려한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군이나 경찰또는 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들이 수감되었던 교도소 교도관들이 보도연맹원 여러 명을 학살했다.

    경찰은 초기 후퇴 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함으로써 한국전쟁 중 최초의 집단 민간인 학살(대량학살)을 일으키고, 경기도 이천에서 군복을 입고 경찰 마크를 붙인 사람들이 국민 보도연맹원 100명을 총살했고, 대전 교도소에서 3000명을 처형하는등, 곳곳에 각 마을별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는 곧 북한 인민군 점령지역에서 일어난 좌파세력에 의한 보복학살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전쟁 와중에 국민보도연맹 조직은 없어졌지만, 지금까지도 정확한 해명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6.25전쟁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은 없지만, 최소 20만 명, 많게는 이 학살되었으리라는 추산이 나오고 있다.

    사건진상조사

    일부 우파단체가 가장 우려한 건 위장 전향 좌파세력들이 유사시에 보도연맹 조직을 이용해 반정부적 활동을 취하리라는 것이었다. 6.25 발발 후 보도연맹원의 대량학살엔 이런 우려가 적잖이 작용했다.

    현재 조사된 남쪽의 학살피해 보도연맹원은 약 20만 명으로 추산이 되고 있다. 오랜기간 언급이 철저히 금기로 여겨져 왔지만, 최근 들어 영화태극기 휘날리며》 등에서 중요한 장면으로 다루어지는 등 논의가 확산되고 있으며, 조정래 선생의 역사소설《태백산맥》에서도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는 내용이 나온다.

    전쟁도 이런 사건도 사상과 이념대립이며 정권탈취야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