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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범한나무늘보
비범한나무늘보22.12.06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한국사를 공부하다보니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자국의 출입구를 봉쇄하여 타국과의 교류를 끊는.. 지금 국제 외교로 생각하면

참 터무니 없는 외교정치라고 생각하는데..

당시 상황을 기준으로 흥선대원군의 이 외교정치

전문가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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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역사를 현재 기준으로만 판단 하는 것은 사실 무리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일본이 치욕을 견디면서 메이지 유신을 하면서 미국의 신문명을 받아들였고 중국이 아편 전쟁의 패전으로 영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변화의 몸부림을 했어야 했는데 우리는 너무도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변화에 대응한 결과 결국 한일 합방이라는 치욕을 겪게 되지요. 결국 흥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그때도 지금도 잘못된 판단으로 보여집니다.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요즘에는 통상수교거부정책이라고 합니다. 사실 일본 메이지유신 이전 에도막부도 쇄국정책을 펼쳤습니다.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펼쪘을 때는 청나라가 아편전쟁의 결과 패해 개항을 강제로 하게 되던 때이고, 2차아편전쟁에서도 패해 개항장 수를 늘리고 연해주도 러시아에게 내어주어 조선은 국경을 러시아와 맞대게된 상황입니다. 서양배들이 연해에 출몰해 통상을 요구하고 급기야 프랑스는 강화도를 침략해 외규장각을 약탈하는 병인양요를 일으켰고 미국은 신미양요를 일으켰는데, 그중 쇄국정책을 굳히게 된 것은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묘를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파헤친 일이었습니다.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이런 일을 일으킨 것이지요.

    하지만 대원군도 마냥 처음부터 쇄국정책을 고수한 것은 아닙니다.당시 천주교는 조선에 체제를 위협하는 중대한 것이었는데 이를 막아보고자 러시아와 교섭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실패로 돌아갔지만요.

    일본 에도막부가 쇄국정책을 고수하다 무너진 것처럼 조선도 무너질 수 있는 위기였고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그런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오늘날의 잣대로 과오라고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매우 부적절한 외교 정책이었습니다.

    당시 주변 상황은 이미 우리가 개항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옆나라 일본은 일찌감치 개항하여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계속해서 개항을 요구하는 열강들을 무력으로 막을 수 있는 힘도 조선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버티다가 강제로 문을 열 바에야 하루라도 빨리 개항하여 서양 문물을 받아 들였다면

    일본에게 그렇게 참혹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 안녕하세요. 신인재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쇄국정책은 당시로보나 지금으로 보나 옳지 못한 정책이긴 합니다만 이해못할 부분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서양 세력들은 아시아에 침입하며 아편 즉 마약을 활용하면서까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또 독일인 오페르트는 조선과 교류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기 까지 했습니다.


    작은 개인의 모습으로 볼 때 인간적 적개심과 분노가 쇄국정책에 큰 역할을 한게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