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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7.16

삼국지의 관도대전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중국 삼국지 시대 이릉대전, 적벽대전과 더불어 3대전투라고 불리는 관도대전은

어느 장소에서 왜 전투가 일어났고, 왜 유명해지게 되었는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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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16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후한 말기 중원의 거대 군벌 조조와 원소의 전쟁입니다.

    관도대전 이후부터 적벽대전 직전까지를 조조의 최전성기로 보는 경우가 대다수일 정도로 삼국지 초반 판도를 좌우한 전역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이 전투가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관도대전은 조조가 중원의 패자로 올라선 결전이었습니다. 관도대전의 패배로 원소가 바로 망하진 않았지만 조조가 대세를 굳히는데에는 부족함이 없었고 후한 말 숨어지내던 전국의 인재들이 허창으로 모여들면서 조조의 패권이 시작됐습니다.
    대전이라고 함은 큰 전투를 일컫는데 관도대전의 경우는 큰 전투 한번 치르고 끝난게 아닌 양 진영이 여러번을 치열하게 맞붙은 경우로 보통 이런 경우는 대전이라는 표현보다는 전역이라는 표현이라고 하는게 맞지만 적벽과 이릉 모두 대전이라는 이름을 쓰는데다가 이미 관용어구처럼 표현이 굳어져 버려 현재까지도 관도대전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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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관도 대전(官渡大戰)은 중국 후한 말 시기에 관도(官渡 : 현재의 허난성 정저우시 중무현 근처)에서 조조(曹操)와 원소(袁紹)가 벌인 큰 전투이다.

    196년 동탁에게 이끌려 장안으로 갔던 헌제獻帝가 수도 낙양으로 돌아오자 조조는 바로 헌제를 모시고 허현許縣에서 자리를 잡는다. 198년 여포가 조조에게 사로잡혀 죽고, 199년 6월 원술이 병사하고, 11월 장수가 조조에게 투항했다. 그리하여, 조조는 하남河南에서 장강長江이북에 걸친 중원의 예주와 연주의 2개주와 서주 일부를 세력권으로 두었다.

    수도와 황제를 장악한 조조는 하북을 석권하고 중원으로 남진을 준비 중인 원소와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 밖에 없었다. 조조의 대망과 원소의 대망이 관도官渡에서 충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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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관도 대전은 조조와 원소가 벌인 전투입니다. 적벽 대전, 이릉 대전과 함께 삼국지의 3대 전투 로 손꼽히는 전투입니다. 조조와 원소가 벌인 전투인데 후한 말 혼란스러운 시대에 전국 각지에서 군웅들이 할거했으며 전란의 시대 였습니다. 관도대전에서 원소는 패배를 하는데 원소의 패배를 가져온 직접적인 원인은 부패한 관료 허유의 배신이었지만,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군의 수장 원소와 근위 세력인 곽도 등의 지나친 독선과 오만함이었으며 이로 인해 간부들의 배신이 속출한 것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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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9년 유비가 서주(徐州)에서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원소와 손을 잡았다. 이에 조조는 직접 출진해 유비를 격파했고 패배한 유비는 원소에게 몸을 의탁했으며, 관우는 조조의 포로가 되어 조조의 객장으로 지내게 되었다. 삼국지 원소전에 의하면 이때 원소의 참모 전풍은 조조가 유비에게 신경이 쏠린 틈을 타 배후를 공격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원소는 아들의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내용은 원소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며 현실적으로 아들의 병환 때문에 큰 일을 무시한다는 것은 이전 원소의 행보와는 전혀 맞지 않는 일이므로 원소의 진의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삼국지 무제기와 곽가전에 의하면 원소가 움직이지 않은 이유가 의심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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