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반정의 구체적은 전개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조선시대에서 '중종반정'의 구체적인 전개과정 어떻게 되나요?
무슨 사건을 계기로 해서 중종반정이 일어났는지
중종반정으로 인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종종반정의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연산군의 학정이 거듭될수록, 조정과 민심은 점차 연산군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연산군의 학정은 비단 정치적인 면에 국한되지 않았다. 비록 반정 후의 기록으로 과장이 있음을 감안해야 하겠으나, 장녹수(張綠水)를 총애하고 여색을 가까이하였으며, 민간의 재산을 함부로 징발하거나 빼앗았다. 지나친 향응을 즐기는가 하면 무리한 궁궐 공사를 추진하였고, 조상의 제사를 경시하였으며 잔혹한 형벌을 남발하였다. 또한 언로를 막고 역사 편찬의 중립성을 훼손하는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비행을 저질렀다.
연이은 사화와 폭정에 지친 신하들은 숨죽여 지내면서, 물밑에서 반정을 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연산군에게는 진성대군이라는, 배다른 아우가 있었다. 유교적 정치 사상에는, 『맹자(孟子)』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국왕이 잘못하여 천명을 잃을 경우, 왕위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혁명’ 사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종의 적자로 왕위 계승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진성대군이 있었기에 반정세력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정의 기획자는 성희안이었다. 그는 연산군을 비난하는 시를 지었다는 이유로 이조참판 자리에서 파직된 후 반정의 뜻을 품게 되었다. 이에 동조할 인물을 찾던 그는 박원종을 눈여겨보았으며, 양자 모두와 교분이 있던 신윤무(辛允武)의 중개로 거사를 결심하였다. 또한 반정의 명분을 세워줄 명망 있는 인물로 이조판서 유순정을 낙점, 그를 끌어들이고 박영문(朴永文), 홍경주(洪景舟) 등을 동원하여 무인을 끌어 모으고 거사 준비를 진행시켜 나갔다.
반정은 연산군이 지방으로 유흥을 떠나는 날 시행되기로 예정되었으나, 연산군은 출발을 취소한 상황이었다. 거사 전날 훈련원(訓鍊院)에서 회합을 가졌던 반정 주도 세력은 거사를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9월 2일 새벽 거사를 일으켰다. 이미 민심이 떠난 연산군을 위해 반정세력을 막아서는 자들은 존재하지 않았고, 이들은 새벽에 창덕궁 앞에까지 나아갔으며, 소식을 듣자 영의정 유순(柳洵), 우의정 김수동(金壽童) 등 조정의 중신들까지 합류하여 반정의 성사는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반정 세력은 왕으로 옹립하기로 한 진성대군의 사저(私邸)로 가 대군을 호위하고, 신수근(愼守勤), 임사홍 등 연산군의 최측근을 제거하여 후환을 없앤 뒤 연산군의 신병을 확보하였다.
이후 대비에게 나아가 반정 사실을 알리고, 진성대군을 새로운 왕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조선 태조의 경우에서 보이듯, 신하들이 주축이 되어 왕을 폐위하고 세 왕을 세울 경우 대비에게 고한 뒤 대비의 명을 받들어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의례적인 절차였기 때문이었다.
대비는 처음에는 자신의 아들, 곧 진성대군이 아닌 연산군의 아들이었던 당시 세자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사양하였으나 현실적으로 폐위될 임금의 아들이 다시금 왕위에 오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연산군의 학정은 전 국가적인 분노를 불러 일으켰고, 결국 반정은 커다란 난관에 부딪히지 않은 채 성공할 수 있었다.
출처: 우리역사넷 종종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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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종 반정은 사실상 연산군이 신하들을 역모로 몰아 가산을 적몰하자(결국 돈 문제) 당대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반정 3대신)이 주도하여 연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 역(후의 중종)을 즉위시킨 사건으로 중종 반정으로 인해 중종이 즉위한 후, 연산군은 유배되어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죽는 걸로 귀결되었습니다. (* 폐위 후 연산군을 독살했다는 설도 유력합니다. )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종반정 요약 : 1506년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이복동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조광조는 중종반정 이후 조정에 출사 하였습니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43750&cid=40942&categoryId=31778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많은 선비들을 희생시켰고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는 세력을 축출하며 경연의 폐지와 대간들의 직언을 금지하게 하는 신언패의 실시, 성균관의 연락 장소화, 도성 밖 30리 내의 민가 철거, 언문 도서의 폐기, 사대부 부녀자의 농락,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인한 정치의 파탄등 수많은 악행을 거듭하여 훈구세력을 중심으로 연산군의 폐위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성희안과 박원종 등은 연산군 폐위를 밀약하고 당시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군자감부정 신윤무 등의 호응을 얻어 왕이 장단 석벽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를 도모, 그러나 연산군의 유람이 중지되면서 거사에 차질을 빚을 뻔 하나 호남지역에서 연산군 폐위의 거사 격문이 서울에 나돌게 되며 당초 계획을 강행합니다.
1506년 9월 1일 박원종, 성희안, 신윤무를 비롯해 전 수원부사 장정, 군기시첨정 박영문, 사복시첨정 홍경주 등이 무사를 훈련원에 규합하고 그들은 먼저 궁금세력으로 권력을 쥐고있던 임사홍, 신수근 과 그 아우 신수영 및 임사영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애워싸고 옥에 갇혀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했습니다.
반정에 성공한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씨의 허락을 받아 연산군을 폐하여 강화도에 안치, 다음날 9월 2일 진성대군을 맞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왕조 제 11대 왕 중종입니다.
결과 연산군의 학정은 끝나나 반정 공신들에 의한 전횡이 이어지면서 근본적인 제도 개혁은 이루어 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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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 때만 해도 훈구파는 비교적 단일한 정치세력으로 연산군과 결탁하여 사림파를 몰아내었다.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의 씀씀이가 커지고 국가재정이 살짝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국정운영은 정상적으로 했고, 백성들의 삶도 아직 성종때와는 별 차이가 없었다.
훈구파는 신수근, 임사홍 등을 중심으로 하는 궁중파와 유자광 등을 중심으로 하는 부중파로 나뉘었다. 갑자사화 때 훈구파는 물론 사림파도 대거 화를 입었다. 그러나 연산군과 혈연 등으로 맺어진 궁중파는 소수였고 부중파가 다수였다. 궁중파인 신수근과 임사홍은 왕에게 아부하며 빌붙어 그의 은총을 믿고 많은 전횡을 일삼았다. 하지만 폭군에 빌붙으면서 전횡을 일삼는 궁중파는 극소수였고 사림파는 물론이고 훈구파의 다수인 부중파는 폭군인 연산군에게 등을 돌렸다.
연산군은 사치와 사냥을 일삼고 유희에 빠지며 국정에 태만하고 재정이 급속히 악화되었으며 사치성 사업에 따른 세금과 공납 증가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급속히 도탄에 빠졌다. 거디다 툭하면 숙청하는 등 반정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다. 신료들은 본인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제일 중요한 문제는 연산군의 사치와 폭정으로 얼룩진 나라를 다시 회복시키려면 반정에 가담해야 했다. 중종반정이 발생하자 상당수의 부궁파들이 슬쩍 반정에 가담했다.
연산군일기를 보면 중종반정 며칠 전 연산군이 후궁들과 놀다가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전비와 장녹수에게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불의에 변이 있겠느냐마는, 만약 변고가 있게 되면 너희들은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하고 물건을 하사했다고 하는데 연산군 본인도 반정이 일어나리라 미리 예측하였다.
이조참판이었던 성희안은 풍자시로 간언했다가 한번에 종9품 부사용으로 좌천되자 박원종을 끌어들여 반정을 모의했다.
박원종의 거사 동기를 "누이인 월산대군[13] 부인 박씨(승평부대부인)가 연산군한테 겁탈당했기 때문"이라고 아는 경우가 많은데,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연산군은 박씨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는 박원종을 보내 간호하게 했는데, 만약 정말로 간통 내지는 강간이 있었다면, 연산군이 일부러 그 사람의 남동생을 보내 간호를 시킬 리가 만무하다. 박씨가 임신 당하여 수치심에 자살했단 이야기도 근거는 없다. 이 임신 이야기의 근거도 연산군일기를 쓴 사관이 실록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한 소문이 있었다'라고 언급한 수준이다. 실록을 보면 연산군이 박씨에게 세자의 보육을 맡기고 곡식이나 포목과 같은 물품을 자주 하사하는 등 박씨에게 상당한 호감을 나타낸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백모로 많이 존대하는 수준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당시 사망당시 박씨의 나이는 51세에, 자신의 직손이 아닐지라도 이미 손자를 세명(파림군 이주, 계림군 이유. 전성부정 이리)이나 두고 있던 할머니였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보면 과연 박씨가 임신을 할 수 있는 몸이었을지조차 불확실하다.
박원종이 중종반정에 참여한 실제 이유는, 연산군과의 알력 때문이었다. 당시 박원종은 연산군에게 유일하게 바른 말을 할 수 있었다. 또한 박원종의 집안도 상당한 명문가였다. 박원종의 증조할아버지인 박석명은 태종 시절 총애를 받았던 문신이었고, 박원종의 할머니 심씨는 세종대왕의 왕비인 소헌왕후의 여동생이었다. 아버지 박중선은 세조의 눈에 띄어 세조-성종 연간간 병조의 사무를 처리한 권력자였다. 사실상 당시 가장 유력한 외척 중 한 명이 박원종이었던 것. 위에 나온 박씨에 대한 호감도 박원종의 총애로 이어졌다. 박원종이 연산군에게 간언을 해도, 연산군은 약간의 불평을 했을 뿐 그를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벼슬을 올려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점점 날이 갈수록 폭정이 심해지고 패악을 부리게 되며, 연산군이 박원종 본인을 포함한 임금과 우호적인 관계자들까지 건드려 협박을 가하고 짜증을 내기 시작해, 박원종을 포함한 신료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우려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고로 위협을 느끼게 된 박원종이 '이대로 계속 버티다가는 죽을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먼저 선수를 쳤다고 해석하는 게 더 옳다.
반정에 부중파가 다수 참여하거나, 참여하지 않아도 간접적으로 지지했으므로 반정 이후 소수의 궁중파를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 훈구파가 그대로 정권을 잡았다. 이는 부중파였으며 연산군 시대 중신이었던 유자광이 반정 1등 공신이 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신수근과 동생인 신수겸과 신수영, 그리고 임사홍은 거사가 시작되자마자 바로 제거당했다. 사람을 각자의 집에 보낸 다음 궁에서 부른다는 핑계로 꾀어내 전부 참살했다.
반정 3공신인 류순정, 성희안이 김종직의 직계이므로 사림 역시 자리를 차지하였다. 훈구파와 사림파는 혈연이나 학연관계에서 딱 떨어지는 개념이 아니다. 사림이 훈구가 되고, 훈구의 자제가 사림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광조인데, 5대조가 조선 개국공신 중 한 명인 훈구 공신 조온이다.[14]
의외로 반정 당시 연산군은 도주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결과를 받아 들였다. 궁을 장악한 반정 세력이 옥새를 요구하자 “내 죄가 중하여 이리 될 줄 알았다. 좋을 대로 하여라.”라며 순순히 내주었고, .교동에 유배될 때도 띠를 두르지 않은 점잖은 차림새로 나와 "내가 죄가 큰데 상(중종)의 덕을 입어 무사히 간다."라며 가마에 올랐다고 실록에 나와 있다. 이 전후에도 연산군이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거나 저항한 기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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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이조참판(吏曹參判) 성희안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박원종, 이조판서(吏曹判書) 유순정,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 등과 함께 왕이 장단(長湍) 석벽(石壁)을 유람하는 날[1]을 기하여 거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왕의 행차가 취소되면서 거사에 차질이 생겼고, 이때 호남 지역에서 비롯된 연산군 폐위 거사 격문이 서울에서도 나돌게 되면서 결국 당초 계획을 강행하였다.
1506년 9월 1일,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을 비롯하여 전 수원부사(水原府使) 장정,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 등은 훈련원에서 무사를 규합한 뒤, 왕비 신씨의 오라버니 신수근과 그의 아우들인 신수겸(愼守謙)과 신수영(愼守英) 그리고 임사홍 등 연산군의 측근을 제거한 뒤,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경복궁에 들어가 자순왕대비의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위하여 강화도 교동(喬桐)에 안치하였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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