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많은 선비들을 희생시켰으며,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는 세력을 축출하였고, 경연의 폐지와 대간들의 직언을 금지하게 하는 신언패의 실시, 성균관의 연락 장소화, 도성 밖 30리 내의 민가 철거, 언문도서의 폐기, 사대부 부녀자의 농락,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인한 정치의 파탄 등 수많은 악행과 폭정을 거듭하니, 훈구세력을 중심르로 연산군의 폐위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중종 반정 사건은 1506년 성희안, 박원종 등과같은 훈구 세력이 임시홍, 신수근 등의 궁금 세력과 결탁해 학정을 거듭하던 조선 제 10대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 대군인 이역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배경으로는 연산군은 1498년 훈구 세력과 결탁해 성리학적인 입장에서 왕도 정치를 추구하는 사림파를 무오 사화로 한 차례 거세하였습니다. 이러면서 정치적인 우세를 더욱 잡은 훈구 세력의 횡포가 더 심해졌고, 권귀화의 경향을 현저하게 보이게 됩니다.
이때 연산군은 궁금 계열 중심의 측근 세력을 등용해 훈구 세력의 경제 기반을 빼앗으려고 갑자 사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연산군의 학정은 더욱 심해지게 됩니다. 자신의 실정에 대한 직간을 멀리하고, 경연과 대제학제도를 폐지하고, 창덕궁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성균관을 잔치를 벌여 즐기는 연락의 장소로 만들게 됩니다. 이러한 연락과 사치를 계속할 뿐아니라, 심지어 내연에 나온 사대부의 부녀자를 농락하는 등 정치는 거의 방기되어 내시에게 맡겨졌습니다.
이러한 연산군의 학정은 궁금 세력과 결탁해 이루어졌기에, 이들을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중종 반정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