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키며 많은 선비들을 희생시키고,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는 세력을 축출, 경연의 폐지와 대간들의 직언을 금지하게 하는 신언패 실시, 성균관의 연락장소화, 도성 밖 30리 내의 민가 철거, 언문도서의 폐기, 사대부 부녀자 농락등 악행과 폭정이 거듭되어 훈구세력을 중심으로 연산군의 폐위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성희안과 박원종 등은 연산군 폐위를 밀약하고 당시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군자감부정, 신윤무등의 호응을 얻어 왕이 장단 석벽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를 도모합니다.
그러나 연산군의 유람이 중지되며 거사에 차질이 있을뻔하나 호남지역에서 연산군 폐위의 거사 격문이 서울에 나돌게 되며 당초 계획을 강행합니다.
1506년 9월 1일, 박원종, 성희안, 신윤무를 비롯하여 전 수원부사 장정 ,군기시첨정 박영문, 사복시첨정 홍경주 등이 무사를 훈련원에 규합하고 먼저 궁금세력으로 권력을 쥐고있던 임사홍, 신근수와 그 아우 신수영, 임사영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이고 궁궐을 에워 싸 옥에 갇힌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합니다.
반정세 성공한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라 경복궁에 들어가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씨의 허락을 받아 연산군을 폐하여 강화도에 안치, 다음날 9월2일 진성대군을 맞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왕조 11대 왕 중종으로 이를 중종반정이라 합니다.
중종반정의 결과 연산군의 학정은 끝났으나, 반정 공신들에 의한 전횡이 이어지며 근본적인 제도개혁은 이루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