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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좋아요 감사합니다!!23.05.20

문벌귀족에 대해 질문드려요..

고려때 호족세력이 문벌귀족으로 형성됐다는데 그럼 여기서 궁금한게 왕권의 힘이 세지면 문벌 귀족의 힘도 세지는건지 오히려 약해지는건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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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신라시대의 지방 귀족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 결혼이었다.

    왕건은 많은 지방세력들의 딸들과 결혼을 하는 이른바 결혼동맹을 추진했다. 지방의 강한 세력을 가진 집안의 딸과 결혼을 하면 왕건은 그들의 사위가 되고 처갓집이 된다. 결혼을 통해 아이(왕자와 공주)를 낳기라도 하면 지방세력들은 왕건의 아들과 딸의 외갓집이 되니 혈육(외척, 외갓집) 관계를 맺게 된다.

    외할아버지와 외삼촌, 외사촌과 같은 외갓집 귀족들은 사위인 왕건과 왕건의 아들과 딸(외손자, 외조카) 를 위해서 일을 하게 된다. 이를 왕실의 보호세력이라고 부른다.

    쉽게 왕건에게 우호적인 세력을 모을 수 있던 방법인 결혼은 고려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문제가 커졌다. 왕건이 결혼을 많이 하다 보니 처갓집의 수가 너무 많아진 것이다.

    왕건은 29명의 부인에게서 34명의 자식들(왕자 25명, 공주 9명)을 얻었다. 아내가 29명이나 되다 보니 그만큼 처갓집의 세력은 강했다. 강한 처갓집 세력은 왕건과 왕실의 든든한 힘이 되었다. 하지만 왕자들의 수가 너무 많다 보니 왕건을 이를 다음 왕위에 자신의 외손자가 앉혔으면 하는 외할아버지의 수도 그만큼 많아졌다.

    29명의 부인들도 자신의 아들이 왕건을 이어 왕이 되었으면 생각을 했다. 29명의 아내에서 낳은 25명의 왕자들은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세력 다툼이 일어나고 만다. 세력이 강한 집안의 아들이 왕이 될 수 밖에 없어 권력투쟁이 일어난다.

    왕건의 29명 아내 중 정식 부인의 수는 6명. 이중 첫 번째 아내의 비중이 컸지만 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왕건의 2번째 정식 부인의 아들, 왕건의 첫번째 아들에게 왕위가 넘어가는데 그가 고려의 2번째 왕 혜종이다. 그런데 혜종의 외갓집은 세력이 아주 약했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왕이 된지 2년 만에 죽고 만다.

    3번째 왕위는 왕건의 3번째 정식 부인의 아들들에게 돌아가는데 제3대 정종, 정종의 동생이 제4대 광종이다. 광종 이후 제5대 왕은 광종의 아들인 경종이지만 경종이 일찍 병이 들어 그의 나이 어린 왕에게 왕위를 물려 줄 경우 권력투쟁이 일어날 것 같아 사촌동생에게 왕위를 물려 주니 6대 성종이다.

    왕건을 이은 다음 왕들은 왕건의 처갓집이자 왕자들의 외갓집들 사이에서 누가 힘이 센가를 겨루는 권력투쟁을 거치면서 다음 왕위를 결정하게 된다. 누가 왕이 되면 자신에게 위협이 되었던 귀족들을 제거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광종이 대표적이다. 광종은 아버지 왕건 이후 왕위계승문제도 내전이 일어나 왕실이 흔들리게 되자 자신이 왕이 된 후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한다. 자신의 외갓집 세력들은 물론 동생들과 사촌들까지도 숙청해 버리는데 이 때문에 왕실의 든든한 배경이 된 외척들이 크게 약화된다.

    누가 다음 왕이 될 것인가하는 문제로 왕건의 아들과 손자들과 그들의 외갓집 세력들 사이에서 파벌(이를 특별하게 규벌이라고 부름)이 생겨 파벌싸움이 일어나게 되어 고려 왕조를 흔들게 된다.

    규벌의 구성한 세력들을 과거에는 문벌귀족, 지금은 보통 문벌이라고 부르며 문벌을 두고 왕실에 위협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문벌은 특정한 가문에 속한 파벌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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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0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의 지배세력. 5품 이상의 고위 관직을 여러 대에 걸쳐 배출한 가문과 그 가문의 구성원을 가리킨다.

    고려 초 건국을 주도한 개국 공신과 지방 호족, 그리고 신라 육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은 중앙의 관직에 진출하여 국가 운영의 중심을 이루었다. 성종(成宗, 재위 981∼997) 이후 이들의 후손 가운데는 여러 대에 걸쳐 5품 이상의 고위 관직자를 계속 배출하여 문벌을 이룬 가문이 등장하였다. 당시 문벌의 구성원은 음서(蔭敍), 공음전(功蔭田) 등의 제도를 통하여 정치적·경제적 특권을 자손에게 물려주었으며, 왕실이나 다른 문벌과 대대로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고려 국가 및 사회의 운영을 주도하는 지배층이 혈연과 혼인 관계를 바탕으로 특권을 재생산하는 사실상의 ‘귀족’ 신분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에서 ‘문벌귀족’으로 부른다.

    문벌귀족은 중앙의 주요 관직을 장악하고,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는 재추(宰樞) 회의의 구성원으로서 정치 권력을 독점하였으며, 대규모의 토지를 소유하여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누렸다. 대표적인 문벌귀족 가문으로는 경원 이씨, 해주 최씨, 경주 김씨, 강릉 김씨, 청주 이씨, 남평 문씨, 파평 윤씨, 철원 최씨 등이 있다. 일부 문벌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비리가 만연하는 폐단을 낳기도 하였다. 불법적인 토지 겸병(兼幷)과 뇌물로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왕권을 위협하는 등 사회의 혼란을 일으켰고, 12세기 후반 무신정변과 농민항쟁이 발생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한편 학계에서는 ‘문벌귀족’이라는 용어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가 제기되기도 한다. 고려 국가 및 사회 운영을 주도한 지배층이 가문과 혈통에 의해 특권을 세습하였기 때문에 ‘귀족적’이라는 주장과 개인의 능력에 따라 과거 등을 통하여 관직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관료적’이라는 주장의 대립이 있다. 문벌귀족이 법제적 신분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사회적 신분으로 실질적 규제를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벌귀족 [門閥貴族]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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