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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대석 일하는 사람이 서요국을 세웠는데요 그는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궁금합니다

1132 년 야율대석은 서쪽으로 옮겨간 요 나라해서 서요국을 세웠는데요. 그는 어떤 인물이었길래 이런 업적이 가능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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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요 덕종 무열제 야율대석은 요나라 황족 출신이며, 서요의 초대 황제 , 묘호는 덕종입니다.

    자는 중덕이며 요나라의 태조 야율아보기의 8대손입니다.

    서요의 무열제라고도 불리며 존호는 천우황제입니다. 1115년 진사에 급제하여 한림원의 승지가 되었고 별칭은 대석임아, 임아대석입니다.

    야율대석이 관직에 오른 시기는 1114년부터 여진족 군사들을 거느리고 요나라를 공격하던 완안부의 수장 완안아골타가 납림하와 출하점에서 요나라의 진압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1115년 정월 초하루에 금나라를 세운 둥대한 시기로, 황제가 된 아골타는 여세를 몰아 요동지역의 황룡부를 함락시켰습니다. 당시 요나라의 황제인 천조제 야율연희는 대군을 편성하여 금나라를 공격했으나 도리어 패배를 당했으며 발해 유민의 후예인 고영창이 1116년 요동의 발해 유민들을 모아 대발해를 세우고 황제를 칭하는 등 요나라의 통제력이 급속도로 무너졌습니다.

    그는 야율아보기와 궁인 소씨 소생 아들 야율 아리과의 후손으로 다른 이름은 달석, 달실, 대실이며 페르시아계 사서 집사에 의하면 그의 칭호는 납석대부였으며 천경 연간에 진사가 되고 문과에 급제했으며 후에 진주 상주 자사, 흥요군절도사를 지냈습니다.

    금나라는 1120년 요나라의 수도인 상경 임황부를 1121년 중경 대정부를 함락,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천조제는 거용관에서 사냥을 하는 등 기대에 미치지 못한 모습을 보이다 내몽골 쪽으로 달아나자 야율대석은 한족 관리 이처온 등과 함께 천조제의 숙부 야율순을 천석황제로 옹립, 요나라의 남경 석진부, 즉 연경에 거점을 둔 별도의 정권을 세웠는데 이것이 오늘날 북요로 불리는 단명 정권입니다.

    야율대석은 해족 출신 장군 소간과 함께 금나라와 동맹을 맺은 송나라의 환관 동관이 거느린 20만 대군을 격퇴하는 등 분투했으나 야율순이 병으로 죽고 1123년 11월 금나라의 맹공으로 연경이 함락당하자 야율대석은 7천 군대를 이끌고 서쪽에 피신해있던 천조제 일행과 합류했습니다.

    야율대석은 바로 베이징 방면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금나라의 포로가 되었고 몇달 후 탈출해 되돌아왔고, 당시 천조제는 금나라 황제 완안아골타가 죽은 것을 기회삼아 금나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을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야율대석이 찾아오자 그에게 금나라군을 몰아내고 영토를 되찾을 것을 요구합니다. 금나라의 강대한 군세를 직접 보고 온 야율대석은 신중히 처신해야 한다는 간언을 올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에 실망한 그는 독자적으로 움직일 뜻을 품고 자신을 따르는 수백명의 사람들을 거느린 채 요나라의 서쪽 변경인 몽골 서부로 갔고, 그 일대에서 점차 인심을 얻으며 만여 명의 군사를 얻고 1124년 서요를 세웠으며 몽골어로 사해의 군주를 뜻하는 구르 칸 이라 칭하고, 1130년 자립해 스스로 왕이라 했습니다.

    1132년 알말리크에서 황제를 칭한 뒤, 연호를 연경이라 했고, 그는 강대한 금나라와 맞서는 것은 시기상조라 생각하고 우선 주변의 중앙아시아 지역을 정복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라 판단해 서쪽으로 원정을 갑니다.

    그는 서역의 투르판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위구르족의 왕 빌게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과거 요나라 태조 요나라 야율아보기가 몽골 고원을 점령한 후 위구르의 원래 근거지인 몽골 고원으로 돌아올 것을 권했던 일을 상기시키며 거란족과 위구르족이 오랜 우호 관계를 유지했음을 강조하고, 대식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 했으며 빌게는 스스로 야율대석의 진영으로 찾아와 가축들을 선물로 주고 호의적으로 전송해 보냈습니다.

    계속 서쪽으로 간 야율대석은 당시 동서로 분열되어있던 중앙아시아의 카라한 왕조가 차지하던 지역으로 갔고 이중 동카라한 왕조는 카를루크족과 투르크인들로부터 위협받고있었는데 마침 부근에 도착한 야율대석에게 구원을 요청, 그러나 야율대석은 동카라한의 수도 발라사군에 당도한 후 카라한 왕을 내쫓고 동카라한 왕조의 영역을 차지합니다.

    야율대석은 여세를 몰아 서 카라한 왕조를 공격했는데 위기에 몰린 카라한 왕조가 종주국인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 산자르에게 도움을 청하여 거란군과 투르크 군은 1141년 사마르칸트 부근의 카트완에서 격돌, 이 싸움에서 야율대석은 산자르에게 대승해 셀주크 투르크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카라한 왕조를 부속국으로 격하시켜 그 일대를 점령했습니다.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호라즘 왕국을 공격해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했고, 이제 야율대석이 세운 나라는 투르키스탄 전역을 점령하여 중앙아시아의 패자로 확고히 자리잡게 됩니다. 그가 세운 나라는 거란의 왕족이 서쪽으로 옮겨 가 세웠기 때문에 중국으로부터는 서요 라 불렸습니다.

    야율대석은 1143년 사망, 묘호는 덕종으로 그가 죽었을 때 막내아들 야율이열은 아직 어려 야율대석의 아내님 감천황후 소탑불연이 1150년까지 7년간 섭정, 모후의 섭정이 끝난 후 야율이열이 즉위해 서요의 2대 황제 인종이 됩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야율대석(耶律大石). 서요(西遼)의 황제. 자는 중덕(重德)이고, 요나라 태조의 8세손이다. 거란문(契丹文)과 한문(漢文)에 능통했고, 말 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다. 천조제(天祚帝) 천경(天慶) 5년(1115) 진사가 되고, 한림승지(寒林承旨)에 올라 사람들이 대석임아(大石林牙)라 불렀다. 거듭 승진하여 요흥군절도사(遼興軍節度使)가 되었다.


    보대(保大) 2년(1122) 천조제가 서쪽으로 달아나자 여러 대신들과 함께 야율순(耶律淳)을 황제로 옹립했다. 다음 해 협산(夾山)에 와서 천조제를 만났지만 노골적인 시기와 의심만 받았다. 다음 해 병사를 이끌고 북행(北行)하여 금나라 천회(天會) 8년(1130)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 다음 해 갈이한(噶爾汗)이라 부르고, 또 천우황제(天祐皇帝)라 부르면서 연호를 연경(延慶)이라 고쳤다. 서요를 건립하고 서역(西域)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했다. 강국(康國) 원년(1127) 도읍을 세워 호사알이타(虎思斡耳朵)라 불렀다. 13년 동안 재위했다.

    출처 : 중국역대인명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