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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배움
오늘배움24.04.07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알려주세요.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알려주십시오.

언제 있었고 배경은 무엇이었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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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유대인 사관 드레퓌스의 간첩 혐의를 둘러싸고 정치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사건입니다. 1894년 10월 참모 본부에 근무하던 포병 대위 A. 드레퓌스가 독일 대사관에 군사 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비공개 군법 회의에 의해 종신 유형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파리의 독일 대사관에서 몰래 빼내 온 정보 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었으나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이 혐의를 짙게 하였습니다. 이후 군부에서는 진범이 드레퓌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확증을 얻었지만 군 수뇌부는 진상 발표를 거부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했습니다. 드레퓌스의 결백을 믿어 재심을 요구해 오던 가족도 진상을 탐지하고, 1897년 11월 진범인 헝가리 태생의 에스테라지 소령을 고발했지만, 군부는 형식적인 심문과 재판을 거쳐 무죄 석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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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사회를 뒤흔든 진실과 정의의 싸움으로 1894년부터 1906년까지 벌어졌던 프랑스의 간첩 누명 사건입니다. 당시 프랑스 육군 대위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독일에게 군사 기밀을 넘겼다는 누명을 씌워 종신형을 선고받고 유배되었습니다. 하지만 드레퓌스는 무죄였습니다. 진짜 범인은 에스테르노지라는 다른 프랑스 장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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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드레퓌스 사건(Affaire Dreyfus)은 19세기 말 프랑스 제3공화국이 독일(당시 프로이센)과 전쟁한 직후에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에게 스파이 누명을 씌워서 조리돌림한 사건입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패전의 원인을 내부 반란분자 때문이라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었고

    국민들도 지나간 전성기를 그리워 하며 군국주의적인 열망을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진짜 독일 스파이가 관여한거 같은, 기밀문서 유출사건이 일어났을때

    차별받는 유대인 출신 장교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재판장에 고위 장교가 직접 찾아와 편지를 판관들에게 보여주자

    판관들이 만장일치로 무기징역을 때렸다고 하니, 재판도 조작했던 거죠

    이 사건은 2년뒤, 국방부 장관이 정보부에 자료파기 지시를 했는데

    정보부가 "이자식 우리 버리려고 하는구나!"라며 따로 숨겨둔 자료가 발견되면서 알려지게 되었으며

    사건이 알려지자

    양심적인 지식인과 법률가들, 공화주의자, 노동계급 등의 여론은 재심을 주장

    왕당파들, 옛 귀족들, 군부세력, 기독교과격파, 보수 우익 정치인들, 군국주의자 여론은 반발 했으며

    그 결과 증거 조작한 앙리 중령은 진급(...)

    진범 에스트라지는 유대교 비밀조직의 음모를 간파 했다면서 무죄를 선고 받고(?)

    자료를 발견해 세상에 알린 피카르 중령은 기밀누설죄로 체포당합니다(!?)

    그리고 이 재판으로 부터 2년뒤, 드레퓌스 체포후 4년뒤에 이 난장판을 참지 못한

    위대한 작가 에밀 졸라가 사건의 진실을 전세계에 알리는 취지의 기사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표하며 사건은 2차 난장판에 빠지게 되는데

    이쯤되면 이미 사건이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서 프랑스는 욕을 먹게 되고

    에밀졸라는 국가 망신을 시켰다며 전국적으로 욕을 먹어서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습니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동범 앙리는 자살, 진범 에스트라지또한 영국으로 도주 하면서

    재심을 하라는 여론이 강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1899년에 재심을 하긴 했지만 재판관 7명중 2명만이 무죄를 선고 했으며

    당시 말라리아에 걸려 피폐해진 드레퓌스를 상대로

    군부가 "죽는 거보다 끔찍한 꼴이 되기 싫으면 항복해라" 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드레퓌스가 항소를 포기, 지지자 들에게도 내가 자백하기 전에 그만둬 달라 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돌아온 에밀졸라가 1902년에 정말로 의심스러운 죽음을 당하면서도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항의는 끊이지 않았고

    결국 정권이 바뀐 뒤인 1904년 3월 이뤄진 드레퓌스의 항소시도는

    결국 1906년 7월 12일 최고재판소의 무죄판결/정부는 소령 특진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

    이라는 승리로 돌아오게 됩니다.(낭비된 10년에 대한 보상은 따로 받지 못했습니다만 )

    감옥생활로 몸이 망가진 드레퓌스는 복권된디 얼마 지나지 않아 퇴역했지만

    세계1차 대전때 돌아와 공을 세웠으며 퇴역한 후로도 살다가 1935년 7월 12일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군부는 1995년 9월, 드레퓌스 사건 100주기 때까지 드레퓌스사거를 공식적으론 인정하지 않았으며

    드레퓌스 석방 후의 반대파들 또한 "이것은 유대인 비밀조직의 음모다" 라면서

    반유대주의를 더욱 강화, 훗날 비시 프랑스의 프랑스 유대인의 색출과 학살로 이어지게 됩니다

    유대인들또한, 드레퓌스 처럼 유대교도 안믿고 멀쩡히 장교로 복무하던 사람조차

    유대인이랍시고 차별 받는 것을 보며, 기독교 중심의 주류 사회에 융화되기 위한 노력들에

    회의감을 느껴 그냥 유대인 끼리 따로 살자는 시오니즘 운동이 시작되며

    이것이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비극의 뿌리가 됩니다


    덤으로 에밀 졸라는 현재 "프랑스의 명예를 지킨 작가" 로써 프랑스의 현충원같은 곳인 팡테온에 묻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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