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3·1운동 후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민족 지도자들이 독립을 쟁취하려고 각지에서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습니다. 중국 상하이에서는 이동녕, 신규식, 조소앙, 여운형 등이 중심이 되어 임시정부를 수립을 모색했습니다.
그 결과 1919년 4월 11일에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상하이, 국내, 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대표자 29명이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민주공화제를 표방하는 임시 헌장 10개조를 제정·공포한 뒤,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6부의 국무원을 구성하였습니다. 이어 4월 13일에 임시정부를 출범했습니다.
당시 상하이의 임시정부 외에도 러시아 영내의 대한국민의회정부, 국내의 한성임시정부를 비롯하여 조선민국임시정부, 신한민국정부, 간도임시정부 등 임시 정부가 7개나 생겨났습니다. 이에 각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임시 정부 통합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성임시정부를 계승하고 대한국민회의를 흡수하여, 1919년 9월 11일에 58개조에 이르는 임시헌법을 공표하고, 9월 15일에 통합정부를 구성했습니다.
지도체제로 대통령중심제를 택하였는데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 겸 군무총장에는 대한국민회의를 이끌었던 이동휘, 외무총장에 김규식, 내무총장에 안창호, 법무총장에 신규식 등을 선출했다습니다 이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중심 기관이 되었습니다.
26년 9월 국무령제를 채택하고 김구 등이 국무령이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32년 항저우로 옮겼다가 중국 정부와 함께 충칭으로 갔다. 40년 광복군을 강화하였고, 44년 김구를 주석으로 선임하였다. 광복을 맞으면서 11월 29일 주요 간부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으며, 임시정부의 내각·정책은 계승되지 못하고 해체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