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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찬하늘소177
힘찬하늘소17723.07.24

퇴계 이황의 주요 업적과 생애가 궁금합니다.

대한민국 화폐 천원에 초상화가 새겨지신 분으로 유명한 퇴계 이황, 조선시대 유학자로 유명하신 분이죠.


조선시대의 붕당 중 하나인 동인의 정신적 지주로도 유명한데요.


퇴계 이황의 주요 업적과 생애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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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성리학의 대표적인 사상가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로서 모두 한국 조폐공사 모델들입니다. 특히 이황의 경사상은 주일무적과 정제엄숙 상성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기호발설을 주장하여 이는 존귀하고 기는 천하다는 이존기비설 이귀기천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이황의 경사상을 믿고 신봉한 이가 일본을 천하통일한 도구가와이예야스였다고 하니 퇴계의 학문적 깊이를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퇴계 이황은 대학자였지만 이가 기가 다르다는 것에 반대하여 편지를 보낸 시골 유생 고봉 기대승(전남 장성)에게 편지를 통한 호낙논쟁을 펼쳐 기대승의 의견을 수렴하여 이는 이발기수 기는 기발이승이라고 정정할 정도로 인품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상북도 예안 출생으로 호는 퇴계 입니다. 1527년 향시에 합격하고 1534년 식년문과에 급제했으며 이후 호조좌랑, 수찬, 정언 등을 거쳤습니다.

    1545년 을사사화때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이 되었으며 이후 정계의 요직을 거쳤고 1569년 정계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도산서원을 창설 후 후진 양서아과 학문 연구에 힘쓴 인물입니다.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해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으며 이언적의 주리설을 계승, 주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 기 이원으로 설명했으며 저서로는 퇴계전서, 시조 작품으로 도산십이곡이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중기의 학자 ·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계호(季浩) · 경호(景浩), 호는 지산(芝山), 영지산인(靈芝山人) · 퇴계(退溪) · 청량산인(淸凉山人) · 퇴도(退陶) · 도수(陶叟) · 계로(溪老) · 퇴수(溪叟) · 도일(陶逸) 등이며,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1501년 음력 11월 25일에 경상도 예안현 온혜리1) 노송정(老松亭)에서 진사 이식(李埴)과 후취(後娶) 부인인 춘천 박씨(春川朴氏)와의 사이에서 6남 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통헌대부 판전의시사로 있다가 홍건적의 난을 토벌하여 안사공신의 호를 하사받고 송안군(松安君)으로 봉해진 이자수(李子脩)의 5대손으로, 조부는 진사 이계양(李繼陽)이다.


    이황의 생애는 30대 이전 · 40대 · 50대 · 60대 이후의 4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501년 출생으로부터 1539년까지 30대 이전의 초년기, 관직생활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던 1540년부터 1549년까지 40대의 중년기,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짓고 본격적인 학문 연구와 교육 활동을 전개한 1550년부터 1559년까지 50대의 노년기, 계상서당과 도산서당(陶山書堂)에 은거하여 학문과 진리를 탐구하면서 은거자로서 삶을 추구한 1560년부터 1570년까지 60대 이후의 말년기가 그것이다.


    태어난 지 불과 7개월 만에 부친을 여의어 부친의 훈도를 받지 못하고, 생모 춘천박씨와 숙부 이우(李堣)의 가르침을 받으며 소년 시절을 보냈다. 21세에 진사 김찬(金瓚)의 딸 김해허씨(金海許氏)와 결혼하였으나 출산 후 사망하자 30세에 안동권씨 권질(權礩)의 딸과 결혼하였다.


    7세 때 경상도 향시에 응시하여 진사시에서 1등, 생원시에서 2등을 하였으며 28세에 진사 회시(會試)에서 2등을 시작으로 34세인 1533년까지 시험에 계속 응시하여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사에 선임되었다가 곧바로 예문관 검열에 천거되었다.


    그러나 장인 권질이 안처겸옥사에 연루된 권전(權磌)의 형이라는 이유 때문에 김안로(金安老)가 사주한 탄핵으로 체직되었다.


    1540년 40세로부터 1549년 49세까지의 중년기에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인해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환급되는 일을 겪으면서 관직에 대한 환멸감을 느끼고 은거할 마음을 굳혔다.


    이 기간 학문과 문예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는데, 서예에 있어서도 기존의 자신의 서체인 조선화된 송설체를 바탕으로 새로운 서체를 습득하기 위해 왕희지체를 비롯한 역대 서예가들의 서풍을 폭넓게 연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 사간원정원 · 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했으며 기타 관직에도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6세 2월에 휴가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때 이웃에 살던 벗 남응룡에게 빌려본 당경신(唐敬身)의 《만죽산방집첩(萬竹山房集帖)》을 돌려주려고 1부를 임서(臨書)하였다.


    서울에 머물던 40대 초 · 중반에는 《비해당집고첩(匪懈堂集古帖)》에 수록된 왕희지의 법첩과 신라 김생의 필적 등 여러 대가의 다양한 서체를 연구하며 자신의 서체의 변화를 꾀했던 것으로 보인다.

    1550년 50세부터 1559년 59세까지의 노년기 동안에는 당시 혼란했던 국정을 피하여 전원에 은거하였다.


    본격적으로 학문연구와 교육활동에 매진한 결과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序)』와 『주자서절요(朱子書切要)』, 『계몽전의(啓蒙傳疑)』 등을 편찬하였고 58세부터는 기대승(奇大升)과 '사단칠정론변(四端七情論辨)'을 시작하였다.


    이처럼 학자로서 부동의 입지를 확립하게 되면서 학문의 새로운 조류를 이해하기 위한 전적을 수집하고 성리학에 관련된 주요 전적을 전파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이 시기에 학문적으로 성숙하여 일가를 이루었고 동시에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도 자신만의 세계를 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서예에서 훗날 '퇴필(退筆)'이라 일컬어지는 그만의 독특한 서풍을 이루면서 많은 서사 활동을 펼쳤다.

    1560년 60세부터 1570년 서거한 70세까지의 말년기에는 주로 계상서당과 도산서당에 은거하면서 심화된 학문연구를 기반으로 진리를 체인(體認)하는 구도자적 삶을 살면서 한편으로 후진교육을 통하여 인간과 사회를 점진적으로 개조해 나가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이황은 원만한 성품으로 평생학문의 결정체인 「성학십도(聖學十圖)」 외에도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특히 50, 60대에는 서예에서 훗날 '농묵초서(濃墨草書)'로 일컬어지는 행서와 초서 외에도 예서 · 해서 · 액서 · 국한문혼용서 등 여러 서체를 두루 구사하면서 지속적인 서사 활동을 펼쳤다.

    이황의 생애와 학문의 변화과정에 있어 특기할 사항은 평생 140여 회의 벼슬이 내려졌어도 70여 회를 사임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황이 학문의 목적을 출세를 위한 학문이 아니라 자기 수양을 위한 학문에 두었다는 증거이다.


    즉 심신연마와 지식의 확충에만 머물지 않고 그러한 덕과 지식을 성(誠)과 경(敬)으로 실천하는 '지행병진(知行竝進)'에 학문의 의미를 두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황의 학문과 사상은 경(敬)과 이(理)로 요약되는데, 일상생활에서는 거경(居敬)으로, 학문적으로는 궁리(窮理)로 일관하였다. 이는 퇴계사상의 핵심인 사단칠정(四端七情)이나 이기심성(理氣心性)에 관한 이론으로, 모두 인욕(人慾)을 막고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천리(天理)를 보존하면서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데에 궁극적인 목적을 두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존천리(存天理)의 구체적 실현의 예는 일상생활에서 때에 따라 적절하게 예(禮)를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황은 후학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반드시 뜻을 세우는 입지(立志)를 우선으로 삼게 하였고, 현묘(玄妙)한 생각보다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를 학문의 바탕으로 삼게 하였다.


    거경궁리(居敬窮理)로 요약되는 퇴계 도학에서 거경심학(居敬心學)의 문제는 심경후론과 성학십도에 집약되었다. 이황은 이들 저술을 통하여 성리설, 예학, 수양론, 의리론 등에서 조선시대 도학 이념의 여러 기본영역을 확고히 정립하고 심화시켰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이황은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를 바탕으로 한 서예관과 학서태도를 견지했음을 살펴보았다. 글씨를 시문과 함께 말기(末技)로 보았으나, 글씨가 인격의 현시로서 그 사람의 성정과 기질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적극적 서예관을 가졌다고 여겨진다.


    때문에 일정한 수준에 들어가려면 부단한 훈련과 연마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또 글씨의 외양을 꾸미는 데에 치중하기보다 '점획존일(點劃存一)'이라 하여 늘 경(敬)의 자세로 하나롭게 견지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한편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하여 시와 글씨 등에 대한 과도한 탐닉으로 인하여 뜻을 잃어버릴까 염려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도학자들처럼 경색된 경문일치(經文一致)의 문예관에 사로잡히지도 않았다.


    오히려 도학자 이전에 시인이자 서예가로서의 성정과 기질을 타고났다고 했을 정도로 초년부터 시작(詩作)을 하였고 시와 글씨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몰두하였다.


    이러한 점은 이황이 단순한 도학자가 아니라 시인이자 서예가로서 예술적 성취가 도학의 성취와 함께 성숙되어 갔음을 짐작하게 한다. 즉 이황에게 있어 시와 글씨는 도학에 못지 않은 문예 방면의 최고 성취였다.


    특히 만물을 시로 쓰고 또 행서와 초서로 구사했던 것은 이황의 도학과 시(詩) · 서(詩) · 서(書)가 예술의 가장 높은 정점에서 하나로 만났기 때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사후(死後)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출처 :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