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하면 청계천이 떠오르던데 청계천의 역사가 어떻게 되는가요?
요즘에는 서울의 명소하면 거의 모든사람들이 청계천을 이야기한다고 하더군요. 너무 좋다고 하던데 서울 청계천의 역사가 어떻게 되는가요?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매년 여름철 비가 많이 내리면 홍수가 발생하곤 했습니다. 이에 따라 태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 청계천 정비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영조 때에는 대규모 공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래 자연하천이었던 청계천은 조선 태종때부터 한양을 서울로 한 조선시대 내내 개거, 준설 등 치수 사업의 대상이었고 태종은 1406년부터 자연상태에 있던 하천의 바닥을 쳐내서 넓히고 양안에 둑을 쌓았으나 큰 비가 올때마다 피해가 계속되었습니다.
1411년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기기구로 개천도감을 설치, 이듬해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큰 공사를 실시, 청계천의 양안을 돌로 쌓고 , 광통교, 혜정교 등의 다리를 돌로 만들었습니다.
개천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 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 때의 개천 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세종은 청계천의 지천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종로의 시전행랑 뒤편에 도랑을 파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켰는데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개천 상류로 몰려들어 넘쳐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도심의 홍수를 예방할수있었습니다.
세종은 1441년 마전교 서쪽에 수표를 세워 수위를 측정할수 있도록 했으며 이후 준설이 없어 토사가 지속적으로 쌓여 오간수문이 막힐 지경에 이르자 영조는 1760년 2월 개천을 준설하면서 하천바닥에서 파낸 흙을 한 곳에 모아 가산을 쌓게 합니다.
오간수문 안쪽에 있던 것으로 하나는 개천 북쪽에, 하나는 개천 남쪽에 남아있으며 일제강점기 도시의 근대화에 따라 사라졌고, 현재는 오간수교 위에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때의 준설과정을 준천사실로 기록, 개천의 물 흐름에 관심이 있던 영조는 1773년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오간수문 근처까지 석축을 쌓았고 이를 통해 구불구불한 하천이던 개천을 영조가 호안공사를 통해 직선화 시켰습니다.
1950년대 중반 청계천은 한국 전쟁 직후 서울시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슬럼 지역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된것이 청계천 복개사업이었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나 1955년에도 일부 이루어졌으나 청계천이 본격적으로 복개된 것은 1958년부터이며, 1958년 5월부터 1961년 12월까지 광교~청계 6동 구간, 1965년~1967년까지 청계 6가~청계 8가 구간, 1970년부터 1977년까지 청계 8가~신답철교 구간이 복개 ,
이 복개된 청계천 위에 청계고가도로가 건설되었습니다.
1990년대 들어 청계천의 복개구조물과 노후한 청계꼬가도로의 안저눈제가 대두, 이에 이명박 당시 서울특별시장 후보는 청계천 복원을 공약하고 32대 시장으로 당선되며 2003년 7월 1일 청계고가도로의 철거가 시작,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부터 성동구 신답 철교에 이르는 약 5.84km의 구간을 복원하는 공사는 3867억 3900만원을 들여 2005년 9월 30일 완료됩니다.
복원된 청계천의 통수단면 위쪽을 흐르는 물은 잠실대교 부근의 자양취수장에서 취수한 한강물과 도심의 지하철역 부근의 지하수를 정수, 소독처리하여 조달, 통수단면 아래쪽에 흐르는 물은 도심의 오,폐수 입니다.
청계천 장통교 옆 벽면에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가을 맞아 화성을 행차하는 것을 그린 반차도를 타일로 옮겨 놓은 벽면 예술, 다산교와 영동교 사이에 복원한 복개 이전에 아낙네들이 빨래를 했던 청계천 빨래터, 청계천 복원 사업에 맞추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황학교와 비우당교 사이에 만든 타일 벽인 소망의 벽 등이 시설물로 설치, 존치교각이라는 이름으로 옛 청계천 고가도로의 교각을 3개 남겨놓았고 청계천 입구의 청계광장에는 소라탑이라는 작품이 설치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계천은 대한민국 서울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천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아래는 청계천의 주요 역사적 사실과 변화를 요약한 것입니다:
조선시대: 청계천은 조선시대에는 수도 서울의 중심을 이루는 지역을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왕궁과 궁중, 그리고 관료들의 생활에 필수적인 물과 경관을 제공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청계천은 일제강점기 동안 크게 변형되었습니다. 1930년대 후반, 일본 식민지 통치 아래에서 청계천은 지하로 감추어지고 그 위에 도로가 건설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청계천의 흐름은 가려지고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개발과 재생: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에 이르러서 서울시는 청계천을 다시 발굴하고 재생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2005년에 "청계천 8계획"이 발표되어 청계천 주변 지역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시설과 문화 행사를 개최하는 등의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습니다. 청계천은 이후 서울 시민들에게 산책로와 휴식처로 인기 있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환경 보전: 청계천의 생태계도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생물종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이를 보존하고 더 나아가 물질 오염과 환경 파괴를 예방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청계천은 서울의 역사와 도시 공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오며, 그 역할이 점차 환경 보전과 문화 활성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장소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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