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에 노론사관은 어떤것인가요?
조서중기를 지나면서 당파싸움이 생겨났다고 들었는데 이중에서 노론사관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노론사관이 생겨났는지 궁금하네요. 우리나라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결과로 어떤 역사관이 생기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후기 붕당인 노론이 조선 후기를 지배했고[1], 심지어 지금도 어찌어찌 계보가 이어져 한국 기득권층을 이루고 있다는 일종의 음모론. 비꼬는 의미에서 노론 메이슨이라고도 부른다.
노론 음모론자들은 유사역사학을 신봉하기 때문에 주류 역사학이 노론의 주도로 형성되고 조작되었다 하여 '노론 사관'이라고 명명한다. 음모론자들이 기존 역사학계의 사관을 폄칭하여 부르는 말이므로, 노론 음모론을 일컬어 '노론 사관'이라고 부르면 혼란이 올 수 있다. 정치 집단이자 유학의 학파였던 노론들이 독자적인 사관을 형성했다는 의견은 학계에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노론 음모론의 문제는 노론 세력이 조선 후기에 군림함은 물론이요, 일제 시대에서도 친일파로 활약했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까지 살아남아 영남 지역을 기반으로 한 보수세력으로 그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음모론을 앞장서서 대중화하고 퍼뜨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덕일.
위에 나왔듯 역사적 배경이 전혀 없는 사관은 아니다. 실제로 노론이 정치적 우세를 점하고 소론과 남인을 조정에서 배제하자, 소론/남인 학자들 사이에서 비슷한 인식이 조선 말기에 퍼졌던 듯하다. 가령 고종 시절 사람인 이건창(李建昌)은 조선 붕당 정치사서 당의통략(黨議通略)을 집필하며, 서인 공신 세력이 "국혼을 다른 세력에게 잃지 말고 재야의 지도자인 산림을 높여 쓰자."고 맹약했고,(일명 물실국혼(勿失國婚), 숭용산림(崇用山林)) "그 이후로도 기반을 잃지 않고 집권할 수 있었다."고 서술한 바 있다.[2] 정조 독살설도 남인 일가의 민담이나 여유당전서 등에도 나오며, 이를 근거로 남인 잔당이 반역을 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썰'들이 (마치 오컬트에 나오는 프리메이슨이나 장미십자회처럼) 권력을 장악한 비밀 결사체라고 노론을 몰아붙이는 음모론으로 바뀐 것은 이덕일을 비롯한 현대 유사역사학이 그 기원이다.
'노론사관'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이덕일이 쓴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2009)』이다. # 이주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도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2011)』이라는 책에서 노론 음모론을 주장했다.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세력이 회니시비(懷尼是非)를 계기로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었는데, 그 중 노론이 경종 시기 잠깐을 제외하면, 조선 말기까지 조선을 장악하였으며 국가 발전에 심각한 폐해를 끼쳤다는 주장이다.
노론 음모론에 따르면, 노론은 우선 사도세자를 악의적으로 모함하여 영조가 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를 죽이게 만들도록 이끌었다. 임오화변을 계기로 노론은 시파와 벽파로 분리되었는데, 벽파가 개혁군주 정조를 독살하고 정권을 잡았다. 즉, 정조 독살설을 주장하는 것. 이후 노론 벽파는 지속적으로 권력을 잡고[3][4] 세도정치를 펼치며 조선을 썩게 하다가, 일제강점기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했다고 주장한다. 노론 음모론자들은 환빠처럼 근현대사에서도 노론 세력의 음모가 계속되었다고 주장한다. 아니 그냥 노론 음모론자들 중에 환빠를 겸하는 사람이 절대 다수다.[5]
노론 음모론자들은 대한민국이 독립하자 노론 세력이 영남 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우파 세력이 되어 지속적으로 진보를 방해해 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른바 '영남 노론'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즉 영남의 보수 우파 문중들이 자기네 정당성을 드러내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다고 노론 음모론은 설명한다. 노론 음모론자들은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노론 사관의 대표적인 역사왜곡 사례로 지목한다. <선조수정실록>의 십만 양병설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했다기보다는, 서인들이 양병설 등 이이의 개혁/경장 주장들을 언급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다가 착오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선 해당 항목을 참고.
노론 음모론자들은 기존 사학계와 적대적인 환빠와 결합하여 주류 사학 = 노론사관 = 식민사관이라고 도식화하고, 대한민국 우파를 조선시대 노론과 친일파에 연결시킨다.[6] 때로는 여기에서 더 발전해 정파적인 주장으로 결론 짓는다. 즉 '영남 노론'이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는 경상도에 기반을 둔 지역감정을 조장하여 기득권을 누리고 정권을 세워, 권력을 유지하며 다른 지방과 진보 세력을 탄압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이 '노론 사관'이란 게 역사학계 내부의 사관이 아니라 정치 영역에서 정파적인 이유로 생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학문 영역에서 노론 사관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적 이미지가 좋은 군주 정조를 자신들에 대입하고, 반대세력은 악의 세력으로 대입해서 노골적으로 정치적 편향을 보이기에 좌파 진영 지지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음모론이고, 그걸 마치 진실인 것처럼 주장하기에 현재도 진실이라고 믿는 지지자들로 인해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출처: 나무위키 노론 음모론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현재 우리 학계는 크게 두 사관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는 조선후기노론사관이고 또 하나는 일제식민사관인데 이 두 가지 사관은 별개가 아니고 한 사관입니다. 노론사관을 이해하려면 먼저 노론이라는 당파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당파가 서인인데, 이 서인의 핵심이 노론입니다. 노론의 사관는 우리들의 임금은 조선국왕이 아닌 명나라 황제이기 때문에, 광해군이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함으로써 임금을 배신했다. 배신한 불충을 저질렀으니까 우리가 광해군을 내쫓는 것은 충성이다. 이런 논리로 인조반정이란 쿠테타를 합리화하죠. 이들은 자국의 국왕을 부정하고, 명나라의 황제를 임금으로 여기는 뿌리부터 잘못된 사관을 가지고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이것이 무너지면 자신들이 집권하는 모든 정당성이 해체가 된단 말입니다. 결국 노론 한 당파의 시각으로 조선후기사를 서술해온 그런 점들을 노론사관이라 지칭을 한 것입니다.
1910년도에 조선이 망하고 76명의 조선인이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는데, 당파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 64명 중 56명이 노론소속입니다.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집권당이었던 노론이란 당파가 조직적으로 나라를 일본에 넘겼다라는 겁니다. 이들은 일제시대 때 조선총독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고, 일본인들로부터 배웠던 일제식민사관을 해방 이후에도 계속 한국사의 주류로 만든 것이죠.
조선사편수회의 원칙은 단순합니다. 한국사의 시간을 축소하고 한국사의 공간을 축소하는 것입니다. 시간의 축소는 한국사의 시작을 삼국사기 초기기록불신론으로 따지면 5천년이 아닌, 약 1,500~1,600년밖에 안되죠. 또 하나는 한국사를 반도 내에 가둬두는 공간의 축소화로 나타나는데, 만선사관이라고 해서 한반도 독자적으로는 역사가 발전할 수 없고 만주에 구속되어서 발전한다는 이야기이죠.
해방 이후에도 조선사편수회 출신들의 역사관이 한국인들 사학계에 주류를 형성했습니다. 우리가 해방된 나라에서 국민들에게 역사교육을 시킨다면 당연히 연암 박지원, 성호 이익, 석주 이상룡, 단재 신채호, 성재 이시영 이쪽 분들로 이어지는, 식민사관이 아닌 역사관을 가르쳐야 하는 건 너무나 상식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그 상식이 통하지 않았으니까 지금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대한민국 자체로서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한 학계에선 현대사는 너무 가깝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가 어렵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독립운동사 연구가 금기시 되었습니다. 1980년대 독립운동사와 사회주의에 대한 연구붐이 일어나면서 실질적으로 현대사 연구를 금지시킨 원칙 아닌 원칙은 깨집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독립운동을 했던 모든 분들이 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1차 사료가 대단히 부족하고, 거의 일제시대의 자료에 의존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보니 독립운동사를 복원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병도의 스승 쓰다소우키치는 한반도의 북부에는 한사군이라는 중국의 식민지가 있었고, 한반도 남부에는 임나일본부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있었다. 그래서 한국사는 위로는 중국식민지, 아래로는 일본식민지로 출발한 역사이기 때문에 지금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하등 이상한 것이 아니라 한국사의 당연한 귀결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임나일본부를 살리기 위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김부식이 창작한 거짓말로 몰게 됩니다.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제 식민사관을 일란성 쌍둥이로,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은 한반도 북부(현재의 북한영토)는 중국의 역사영토였다고 하는 것인데, 일제 식민사관과 내용이 똑같은 겁니다. 왜 논리가 같을 수밖에 없냐면 침략사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다보니까 국민들이 보기에는 마치 우리도 동북공정에 맞서서 싸우는 것 같지만 내심으로는 동북아역사재단 홈페이지에서 나타나듯이 동북공정과 같은 얘기를 하고 있거든요.
중국은 현재 우하량 유적 한가운데를 뚫고 4차선 도로를 놓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우하량 유적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가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인데 중국은 이 유적이 사라지길 바라는 겁니다. 중국 동북공정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말해주는 유적 유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쪽을 빨리 연구해서 우리민족의 시원은 어딘가라는 부분까지도 홍산문화가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인데,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는 홍산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생뚱맞다라고 할 정도로 거의 연구가 안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병도의 학병권유 글 (1943. 11. 26.)
학도 출진의 대명을 받들고 특별지원병으로서 제국의 군인이 될 수 있는
광영의 길이 열린 것은 반도학도로서 이보다 더 큰 감격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감격을 길이 빛내어 순충보국의 결의를 더욱 굳게 하여
전통적 상무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반도의 여성은 이것을 계기로 더욱 상무적인 교양에 힘써
군국의 어머니로서 손색없는 총후 여성의 귀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이 기회에 출진하는 학도와 우리의 어머니를 격려하는 의미에서
옛 조선 신라 시대의 화랑의 정신과 그 어머니를 살펴보기로 한다.
어머니의 굳센 격려는 전투 용기를 백배나 더하게 한다.
우리는 이조 5백년의 그릇된 유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문약에 빠지고,
인습적 가족제도의 폐단인 남존여비 사상과
계족(系族)을 중심으로 한 도덕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상무정신과 충군애국의 사상이 희박한 결함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일시 역사적 폐단에 지나지 않고
전통적으로 조선민족이 문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 예를 신라의 화랑에서 들어보면 잘 알 수 있다.
화랑은 원시신앙에 기원한 신라의 고유한 도이다.
원래 신라에서는 육체미를 존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영육일체 사상, 즉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희랍 사상과도 같은 종류의 것이다.
화랑은 처음에는 원화라고 하여 아름다운 여성을 택하여 단장을 삼았다.
그러나 남모와 준정이라는 두 단장이 시기하는 마음에서 질투가 일어나
서로 싸우다가 둘 다 죽어버린 후에는 이에 폐해가 있다고 해서
남성이 대신하였으나 역시 나이어린 미소년 특히 귀족계급에서 택하였다.
나이어린 소년을 단장으로 택한 것은
혈기 왕성하여 물불을 헤아리지 않는 청소년이어야만
의용(義勇)심을 기를 수 있다는 데 그 연유가 있었다.
인물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은 행위가 방장하여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과 육의 일체를 주장하는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화랑은 의에 살고 죽으며 가악을 숭상하였다.
이것은 정서도야를 의미한다.
또 명산대천을 돌아다닌 것은 육체단련과 순례의 의미가 있다.
산에 들어가서 국가의 번창과 일가의 흥륭을 기도하며
천금이라도 의가 아니면 받지 않는 고결한 기품으로
대자연 속에서 연마 양성한다는 뜻을 가졌다.
전시에는 단체를 이끌고 출정하여 생명을 홍모(鴻毛)처럼 가볍게 버리며,
의를 태산과 같이 중히 여기었다.
즉, 화랑은 전장에 나아가 패하게 되면 마땅히 죽을 것으로 알았고
죽지 않고 구차하게 살아 돌아옴을 무엇보다 남자의 수치로 여겼다.
그런 예를 하나 들면 품일 장군의 아들 관창이다.
백제와 황산에서 싸우다가 전운이 불리하여 적의 포로가 되었을 때
백제 장군계백이 관창의 투구를 벗겨보니 후안의 미소년이었다.
적장은 가련한 생각을 금치 못하여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 보냈으나
재출진하여 싸우다가 죽음으로써 신라군의 울분과 사기를 북돋았다.
그리고 근자에 경주에서
壬申二年六月十六日 二人 ×× 記天前書...(이하줄임) 이라는
돌에 새긴 문헌이 발견되었다.
이 글의 문맥은 임신2년 6월 13일 두 사람이 함께 하늘 앞에서
지금부터 3년 동안 충도(忠道)를 닦아서 과실이 없기를 맹세하여
만일 이 맹세를 저버리면 하늘의 큰 죄를 얻으리라고 하였고,
또 만일 국가에 불안하고 대란이 일어나면
반드시 충도를 행하여 국난을 막기를 맹세한 내용이다.
학도 출진의 동원령 아래 장차 결전장으로 나아가게 될
반도의 학도들에게 한층 더 감명 깊은 문헌이 아닐 수 없다.
위에서 말한 상무정신과 도의심은 화랑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라의 시대정신이 일체로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승려계급에도 이러한 도의정신과 상무정신이 지배적이었다.
즉, 그런 예를 들면 원광법사라는 유불에 통한 중은 세속오계라 하여
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以信 臨戰無退 殺生有擇을
가장 큰 교훈으로 제자를 가르쳤다.
이 교육을 받은 귀산과 추항이라는 두 청년은 신라가 백제와 싸울 때
출진하여 법사의 교훈, 임전무퇴의 훈계를 지키기로 하고
만신에 창검을 받고도 용전분투하다가 장렬히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시대에 국가를 위해 싸우다 죽은 열혈청년이 어찌 그 두 청년뿐이랴.
그리고 일반남자뿐이 아니라 여자에게도 상무적인 시대정신이 농후하다.
김유신 장군이 16세 때 미소년의 화랑으로 무예를 닦기 게을리 하고
화류의 거리에 출입하다다가 잘못을 뉘우치고 뒤에 큰 공을 이룬 것은
그 어머니의 훌륭한 상무적 교양에 의한 것이었다.
유신의 아들 원술이 당병과 대방의 들에서 싸우다가 패하고
죽으려하다가 부하의 만류 때문에 죽지 못하고 돌아왔을 때
그의 부친 유신장군은 국왕께 왕명을 욕되게 하였고 가훈을 저버렸으니
죽여 마땅하다고 상소하였다.
그러나 국왕의 사죄로 말미암아 시골로 가서 파묻혀 지냈는데
아버지가 별세한 뒤에 어머니께 뵙기를 청하였다.
그 어머니는 원술로 말하면 아비에게 자식노릇 못하였으니
나도 그 어미가 될 수 없다고 대면하기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얼마나 화랑의 어머니가 아들교육에 엄격했던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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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발해군왕 임명 관련]
그 뒤 당으로부터 발해 군왕의 책봉을 받아 이후 발해라고 불렀다.
(1968년 문교부 검정 국사 교과서 저자 이병도 63p )
발해는 고구려가 멸망한지 30년 뒤인 698년에 건국되어 926년 멸망하기까지 230년 가까이 남쪽의 신리와 남북국을 이루었다. 국호는 처음에 진국이라 하였으나 713년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책봉되면서 발해로 고쳐 불렀다. - 아틀라스 한국사 56p 한국 교원대 송호정 교수 집필 (사계절 출판사 2004년판) -
위의 논리면 아래는 모두 역사적 사실일 뿐이다. 중국이 잘못한게 없는거다.중국은 현재 지린시 룽탄(龍潭)구 룽산루에 ‘용담산국가고고유지공원(龍潭山國家考古遺址公園)’을 조성하고 있다. 이곳은 부여(夫餘)·고구려·발해가 있던 지역으로, 중국은 ‘용담산개발건설공정(龍潭山開發建設工程)’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고대사 유적을 ‘중국 것’으로 만들고 있다. 주요 공사 항목 가운데 발해 왕이 당나라 사신들에게 무릎을 꿇은 채 당 현종의 조서를 받는 동상도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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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주류 사학계의 고대사 인식이 일본 식민사관에 깊게 경도되어 있다면 조선 후기사 인식은 노론사관에 깊게 경도되어 있다. 몸은 21세기에 살지만 역사관은 일제와 조선 후기 노론에 두고 있다는 뜻이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은 자기정체성 부인과 사대주의 극대화라는 점에서 인식이 같을 뿐만 아니라 인맥으로도 서로 연결된다. 노론의 뿌리는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이다.
-출처: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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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세력이 회니시비(懷尼是非)를 계기로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었는데, 그 중 노론이 경종 시기 잠깐을 제외하면, 조선 말기까지 조선을 장악하였으며 국가 발전에 심각한 폐해를 끼쳤다는 주장이다.
노론 음모론에 따르면, 노론은 우선 사도세자를 악의적으로 모함하여 영조가 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를 죽이게 만들도록 이끌었다. 임오화변을 계기로 노론은 시파와 벽파로 분리되었는데, 벽파가 개혁군주 정조를 독살하고 정권을 잡았다. 즉, 정조 독살설을 주장하는 것. 이후 노론 벽파는 지속적으로 권력을 잡고 세도정치를 펼치며 조선을 썩게 하다가, 일제강점기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했다고 주장한다. 노론 음모론자들은 환빠처럼 근현대사에서도 노론 세력의 음모가 계속되었다고 주장한다. 아니 그냥 노론 음모론자들 중에 환빠를 겸하는 사람이 절대 다수다.
노론 음모론자들은 대한민국이 독립하자 노론 세력이 영남 지방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우파 세력이 되어 지속적으로 진보를 방해해 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른바 '영남 노론'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즉 영남의 보수 우파 문중들이 자기네 정당성을 드러내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다고 노론 음모론은 설명한다. 노론 음모론자들은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노론 사관의 대표적인 역사왜곡 사례로 지목한다. <선조수정실록>의 십만 양병설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했다기보다는, 서인들이 양병설 등 이이의 개혁/경장 주장들을 언급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다가 착오했다고 보아야 한다.
노론 음모론자들은 기존 사학계와 적대적인 환빠와 결합하여 주류 사학 = 노론사관 = 식민사관이라고 도식화하고, 대한민국 우파를 조선시대 노론과 친일파에 연결시킨다. 때로는 여기에서 더 발전해 정파적인 주장으로 결론 짓는다. 즉 '영남 노론'이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는 경상도에 기반을 둔 지역감정을 조장하여 기득권을 누리고 정권을 세워, 권력을 유지하며 다른 지방과 진보 세력을 탄압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이 '노론 사관'이란 게 역사학계 내부의 사관이 아니라 정치 영역에서 정파적인 이유로 생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학문 영역에서 노론 사관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적 이미지가 좋은 군주 정조를 자신들에 대입하고, 반대세력은 악의 세력으로 대입해서 노골적으로 정치적 편향을 보이기에 좌파 진영 지지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음모론이고, 그걸 마치 진실인 것처럼 주장하기에 현재도 진실이라고 믿는 지지자들로 인해 많은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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