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그룹이 해체된 이유가 궁금해요
1980년대 초 재계순위 7위였던 국제그룹은 회사가 해체되는 비극을 맞이했는데요 경제적인 이유였나요 아니면 정치의 희생양이었나요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제그룹의 해체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무리한 기업 확장과 해외 공사 부실 등의 이유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정치자금의 납부실적이 부족해서 권력층의 눈밖에 난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제그룹은 1985년 전두환 정부가 국제그룹을 해체시켰습니다.
전두환 정부는 1981년 12월 대통령령으로 부실기업 처리를 위한 비상기구로 산업정책심의회를 설치, 부실기업을 정리합니다. 중화학공업 투자조정, 산업합리화 정책의 미명하에 1985년 5월 부터 1988년 2월 까지 총 6차례 걸쳐 부실기업정리가 단행되었는데 해운업을 필두로 조선, 합판, 섬유, 제지 , 종합상사 등 광범위한 업종에 걸쳐 이루었으며 이런식으로 1988년 까지 모두 78개의 기업이 합리화 대상으로 지정, 3자 인수방식으로 정리됩니다.
부실기업을 인수하는 기업에 대해 각종 특혜가 있었는데 이런 기업들은 대출원리금 상환을 유예, 이자 지급 , 조세 감면을 받았으며 시드머니를 비롯한 금융과 세제상의 특혜를 주었습니다.
1984년 12월 27일 국제그룹의 어음 거래 계좌 개설 은행인 제일은행은 교환 회부되어 온 국제 상사 발행 어음을 부도처리 사전 협의제 운용 지침 등의 관행을 외면하고 일방적으로 처리해 국제그룹의 부도를 유발, 이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 국제그룹의 자금 조달 계획에 차질을 주기 위해 재무부 장관에게 지시하여, 관련 금융기관의 국제그룹 여신 지원 방침을 전면 취소하고 이를 알리지 않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국제상사는 심각한 경영 위기에 직면했고 채권 은행들과 은행감독원이 국제그룹을 정상화시킨다는 기업 정상화 금융 지원 계획을 내놓고 이에 국제그룹도 자구 노력 이행 계획을 확정하지만 전두환은 1985년 2월 7일 ~ 11일 사이 재무부 장관에게 국제그룹 해체와 관련한 지시를 비밀리에 내렸고 재무부 장관은 2월 20일 제일은행장을 불러 기업 정상화 금융지원 계획과 국제그룹의 자구 노력 이행 계획을 무단 파기토록 했으며 국제그룹 전면 해체 및 전 재산 처분 위임장을 강제 징구하라 지시합니다.
이튿날은 2월 21일 제일은행장이 국제그룹의 전면 해체 방침을 발표, 주식 및 경영권 영도 가계약 , 주식매매 계약서 청구인의 서명 날인을 강제로 받으며 재계 서열 7위의 국제그룹은 공중분해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재계 순위 6위에 랭크될 정도로 승승장구하던 국제그룹은 5.18을 짓밟고 집권한 전두환 대통령의 눈에 벗어나면서 자금경색으로 제1차 부도가 나고 제2금융권 뿐만아니라 사채시장에서도 돈을 구하지 못해서 최종 부도처리되어 검정고무신에서 횐고무신으로 프로스펙스 운동화 출시로 승승장구하던 국제그룹은 공중분해 되고 맙니다. 전두환 정권 초기에는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 부부 현대 삼성보다 전두환 부부곁에서 회식을 할 정도로 가까웠으나 기업의 미얀마폭발사고(전두환 대동령과 정부 각료들이 미얀마 국립묘지 방문 중 폭발사고로 전두환만 살아남고 대부분 각료들 사망한 사건)로 희생된 각료들을 위한 기부금 모금에 소극적이었고 부산지역 국회의원 선거에 협조차 내려간 전두환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도미(자식 49제차)한 것을 괘씸하게 여겨서 결국 해체 위기를 겪게된 것으로 봅니다.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두환 정부는 1981년 12월에 대통령령으로 부실기업 처리를 위한 비상설기구로 산업정책심의회를 설치하고 부실기업 정리에 나섰습니다.
그런 중에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은 전두환 눈밖에 나는 일이 많아졌고, 결국 정치의 희생양으로
공중분해됩니다.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제그룹은 1947년 창업자 양정모 회장이 부산 동구 범일동에 세웠던 고무신 생산 업체 국제고무공장에서 출발했다. 이 공장의 고무신 브랜드는 ‘왕자표 고무신’이었다. 1960년 3월 범일동 공장에서 불이 나 62명이 숨지고 39명이 다쳤다. 1962년 국제고무공업은 국내 회사로는 최초로 미국에 농구화를 수출했다. 1973년 사명을 국제상사로 바꾸고 이 해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국제상사는 1981년 국산 신발 브랜드인 ‘프로스펙스(PRO-SPECS)’를 만들었다. 프로스펙스는 이 해 미국 마라톤 전문 월간지 <런너스 월드(Runners World)>로부터 별 5개 등급을 받으며 미국 6대 스포츠화로 선정됐다. 1975년 국제상사는 종합상사로 지정됐다. 국제그룹은 1970년대 중화학, 섬유, 건설 분야 등에 진출하며 성창섬유, 국제상선, 신동제지, 동해투자금융 등을 세웠다. 1977년 연합철강과 그 계열사인 연합물산, 연합개발, 연합해운을 한꺼번에 인수했다. 국제그룹은 1980년대 21개 계열사를 두며 재계 서열 7위에 올랐다. 1985년 국제그룹의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이 ‘국제그룹 정상화 방안’을 발표했다. 이 방안에 따라 국제상사 건설부문과 동서증권은 극동건설그룹으로, 연합철강은 동국제강그룹으로, 나머지 계열사는 한일그룹으로 각각 인수됐다. 성신토건과 국제토건은 청산됐다. 제일은행이 밝힌 그룹 해체의 표면적인 이유는 무리한 기업 확장과 해외 공사 부실 등이었다. 그러나 양정모 회장이 전두환 정부에 밉보여 그룹이 해체됐다는 것이 재계의 정설이다. 당시 재계에서는 ‘총선 때 국제그룹의 협조가 부족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에 양 회장이 폭설로 늦게 참석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퍼졌다. 1993년 7월 헌법재판소는 “전두환 정부가 국제그룹 해체를 지시한 것은 기업 활동의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 위헌”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양 회장은 한일합섬을 상대로 자신의 주식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다. 그러나 양 회장은 1994년 “개인이 맺은 계약을 무효화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패소했다. 양 회장은 2009년 3월 29일 타계했다.
출처 :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둘다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이유는 국제그룹이 과도한 투자와 차입으로 부채비율이 높았고, 금융위기 이후 자금난에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이유로는 국제그룹의 주주였던 김우중 전 산업부 장관이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며 정부로부터 압박을 받았다는 점 등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치적 희생양입니다. 다른 기업들은 10억 원 이상 정치자금을 부담했는데, 그 당시 국제그룹은 3억 원 정도 부담했습니다. 그리고 총선을 대비해 재벌 총수들을 소집해서 만찬을 열었는데,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이 지각을 했습니다. 이전부터 좋지 않게 보던 전두환이 민정당이 이기려면 무엇을 하면 좋겠냐고 양정모 회장에게 물었습니다. 양 회장은 부산지역 쪽에 임해공단을 건설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부산은 야당 세력인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이었습니다. 이 발언 이후 5일 뒤 국제그룹은 1차 부도사태를 맞이하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