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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가오리188
즐거운가오리18823.11.29

강감찬 장군은 문신 출신이라 아는데 어떻게 장군이 될 수 있었나요?

고려시대에 거란의 3차공격을 막아낸 강감찬 장군은

처음에는 문신으로 등용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란3차 침입때 무관으로 전쟁에 출전하셔서

역사에 남을 공을 세우셨는데

당시 문신출신이었는 강감찬 장군이

어떻게 전쟁에서 장군으로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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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 장군은 고려시대 문관입니다. 983년(성종 3)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 한림학사를 거쳐 평장사가 되었습니다. 요나라의 3차 침입을 격퇴시켰고 1019년(현종 10)에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 문화평장사 천수현 개국남 식읍삼백호에 봉해졌습니다. 1020년(현종 11)에 특진 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가 되었고 1030년(현종 21)에 문하시중이 되었고 1031년(현종 22)에 특진 겸교태사 시중 전수군개국후에 이릅니다. 특히 1018년에 경관직인 내사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와 외관직인 서경 유수를 겸하였습니다. 서경 유수는 단순한 지방행정직이 아니라 군사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강감찬이 이 직책에 임명된 것은 요나라 요나라의 재침에 대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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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조의 정변으로 젊은 효종이 즉위하고 출세길이 트이는데 1010년 요나라의 성종이 40만대군으로 침공, 대세 의견인 항복을 반대하고 홀로 몽진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킵니다.

    그 후 하공진으로 하여금 요 성종을 설득해 물러나게 했으니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그 다음해 중추사에 올랐다가 곧바로 이부상서가 되고 현종 9년 서경유수와 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가 됩니다.

    함경도 쪽으로 파견되어 동여진의 침입에 대비, 1019년 거란의 제 3차 침공 당시 서북면행영도통사였던 그는 고려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거란 방어 작전을 진두지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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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 장군은 983년(성종 3) 과거에 문과 장원 급제하여 예부시랑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거란의 2차 침입시 현종을 피난을 건의하여 사직을 보호한 공으로 문하평장사와 서경 유수를 겸하게 되었으며, 3차 침입시 상원수로 군사 20만을 이끌고 1019년 귀주대첩로 거란을 격퇴하였습니다.

    강감찬 장군이 장군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된 배경은 20만군을 '상원수'로서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장수라는 측면에서 장군이라는 칭호로 불릴 수 있습니다. 즉 임시직 '상원수'에 의미가 있습니다. 두번째는 고려는 무신의 최고 직책인 상장군이 정3품으로 대군의 지휘권은 문신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국방을 논의하는 최고 기관인 도병마사에 무관이 참여할 수 없습니다.

    강감찬은 1029년 문하평장사(정2품), 1030년 문하시중(종1품), 1031년 중서령(종1품) 추증으로 모두 문관 관직을 제수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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