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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21

벽란도가 그당시 얼마나 유명했길래 많은 사람들로 붐볐는지 궁금해요

고려시대 최고의 해상관문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요. 사극을 보다가 그당시 무역을 하러 왔던 송나라와 아라비아 상인들이 여러가지 값비싼 물건을 사가서 알려졌다고 하는데요. 그당시 얼마나 유명했나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 붐볐는지도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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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23.04.21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하구의 무역항이자 요충지.


    예성강 하구에 자리 잡은 항구로 고려 무역의 중심지 였습니다.(이유:도읍지인 개경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고,물이 깊어 큰 배도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벽란도 에는 송나라, 일본, 동남아시아, 아라비아 상인들이 많이 오갔고 갔기 때문에 새로운 문물을 가장 빠르게 만날 수 있는 곳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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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제적인 교역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나가거나 국내로 들어오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려의 관문적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국내에서 벽란도는 국도인 개성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나루터였다. 특히, 육로로 중국에서 오는 도로상에 있어 통행인도 많았던 교통의 요지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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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시대 당시 벽란도는 진귀한 물건을 가지고 찾아오는 외국 상인들로 활기에 차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에서 수출하는 물품은 금, 은, 구리 등의 지하 자원과 산삼, 잣, 부채, 모시, 종이 등이었으며, 송나라로부터 주로 수입하는 것은 책, 비단, 자기 등이었다고 합니다. 또, 아라비아 상인들도 수은, 향료 같은 것을 가지고 벽란도에 드나들었는데, 고려라는 이름이 이 때 이들에 의하여 서양에 알려져, 외국에서는 지금도 우리 나라를 코리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서양에 알린 최초의 대외 시장 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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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벽난로는 고려시대 예성강 하구의 무역항 이자 요충지 였습니다.
    비교적 물이 깊어 선박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으며 고려 시대의 국도였던 개성과 가까이 위치 하였던 관계로 벽난로는 고려 시대 제일의 하항이자 실질적인 유일의 국제 항구로 발전 하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과 거리가 가까웠고, 수심이 깊어 밀물을 이용하면 크고 작은 배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 중 가장 활발히 교류된 물품은 송이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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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벽란도는 당시 국제적인 무역항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중국과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무역을 하기 위해 벽란도를 찾는 등 번성을 누렸습니다. 이는 고려라는 국가가 초기 기틀을 확립하고 안정되는데 기여한 부분도 있으며, 정확하게 몇 명이 붐볐다라는 것은 알기 어렵겠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벽란도를 찾았었다 이렇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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