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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발발이142
로맨틱한발발이14223.11.30

동예는 어떤 시기에 존재했고,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나요?

우리나라 역사에서 동예라는 국가가 있었다고 배웠는데요.

자세한 내용은 몰라서 그러는데 동예가 어떤 시기에 형성되었으며, 주요한 특징과 문화는 어떤 것이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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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3세기 전반 무렵 동예는 북으로 고구려·옥저(沃沮)와 접하고, 남으로 진한(辰韓)에 이어지며, 서로는 낙랑군(樂浪郡)과 접했다고 전한다. 인구는 2만여 호(戶)에 혼인·장례 등의 풍속과 언어가 고구려와 비슷했으며, 의복은 다른 점이 있었다고 한다. 동예인들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족속이라 하였다고 한다

    과 내[川]를 경계로 하여 구역이 나뉘어 있어 함부로 다른 읍락의 구역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한다. 이를 어겼을 경우 곧 벌책을 가해 생구(生口), 즉 노예나 소, 말 등으로 보상하게 하는 책화와 더불어서 공동체적 유대가 강한 국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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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지금의 원산에서 강릉까지 사이의 중부 동해안 지역에 자리잡고있던 부여족 계열의 부족 국가로 옥저와 마찬가지로 한군현에 속해 있다 6세기 이후 멸망합니다.

    공열 토기로 대표되는 무문토기문화이며 주민은 옥저, 고구려와 같은 예맥족, 언어, 풍속도 거의 같았습니다. 중기 이후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특산물로 단궁, 문표, 과하마, 반어피, 명주 , 삼베 등의 있었고 혼상법은 고구려와 비슷해 동성간 혼인을 하지 않고 질병자나 사망자가 있으면 곧 집을 버리는 등 금기가 많았습니다.

    주민은 검소, 근면하고 싸움에 능했으며 10월 무천이라는 제천행사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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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동예는 고조선이 멸망하고 부여와 고구려가 나누어지던 시기에 오늘날 함경도 및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선진문화의 수용이 늦었으며, 일찍부터 고구려의 압박과 수탈로 인하여 크게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각 읍락에는 읍군이나 삼로라는 군장이 있어서 자기 부족을 다스렸으나 이들은 통합된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습니다. 동예는 옥저와 마찬가지로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경제생활이 윤택하였으며 특히, 명주와 삼베를 짜는 등 방직 기술이 발달하였습니다. 단궁이라는 활과 과하마, 반어피 등의 특산물이 유명하였습니다.

    동예에서는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매년 10월에 열었고, 씨족 사회의 풍습이 남아 있어 족외혼(族外婚)을 엄격하게 지켰으며, 산과 내마다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다른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였을 경우 책화(責禍)라 하여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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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동예는 기원전 82년에서 부터 6세기경 한반도 동해안 일대의 옥저 아래(강원도 북부~함경도 남부) 지역에 자리 잡은 국가입니다. 6세기 진흥왕 때 영토로 편입되었습니다. 진흥왕은 이곳에 황초령비와 마운령비 순수비를 세웠습니다.

    동예는 토지가 비옥하고 어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하여 경제 생활이 윤택했습니다. 그러나 변방에 치우쳐 있어 선진 문화를 수용하는 데 늦었습니다. 왕은 없었으며 읍락마다 읍군, 삼로라고 불리는 군장이 있었습니다. 동예는 명주와 삼베를 짜는 방직 기술이 발달했으며, 특산물로 단궁이 라는 활과 과하마, 반어피 등이 유명했습니다. 씨족 사회의 전통이 남아 있어 족외혼을 엄격하게 지켰으며, 다른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했을 때에는 책화라고 하여 노비나 소, 말로 배상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산천을 중시하여 산과 내마다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해마다 10월에는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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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지금의 원산ㆍ안변 일대에서부터 경상북도 영덕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과 강원도 북부 지방에 거주했던 고대 종족입니다. 실제로 의복만 달랐을 뿐 풍속과 언어는 고구려와 같았습니다. 3세기에는 읍락이 산과 하천을 경계로 구분하였으며 함부로 다른 구역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만약 다른 읍락민이 침범하면 곧바로 소ㆍ말을 물리는 책화를 하거나 생구(노예)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읍락 내부에 아직도 공동체 단위의 생활이 주로 영위됨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동예지역에는 강력한 군장이 출현하지 못하고 후ㆍ읍군ㆍ삼로가 각 읍락를 다스렸습니다. 2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 지배하에 있다가 245년 위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범할 때 낙랑군의 공격을 받고 다시 낙랑군의 지휘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313년 낙랑군이 멸망된 뒤에는 다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고 광개토대왕 때 대부분 고구려 영토가 되었습니다. 농업을 주로 했으며 제천의식으로 무천이 있었고 특산물은 반어피(표범가죽) 단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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