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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22
바버2223.02.20

병자호란이 왜 일어난건지 역사배경 알고 싶습니다!

이전에 고등학생때 병자호란 역사를 배운거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나서요. 최근에 역사 유튜브를 보다가 병자호란을 들었는데 자세한 역사 배경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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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2.20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 인조 때인 1636년에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해 일으킨 전쟁이며

    병자년에 오랑캐가 일으킨 전쟁이라는 뜻에서 ‘병자호란’이라고 부릅니다.

    조선군은 청의 군대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으나 끝내 이기지 못했다. 청의 임금인 태종이 직접 이끌고 온 13만여 명의 청나라군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한양을 포함한 조선의 주요 지역을 장악했다.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 뒤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나라로 조약을 맺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후금은 중국 대륙을 놓고 명과 벌이던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자 태도가 달라졌다. 이전에도 후금은 조선 조정에 막대한 물자를 바치라고 강요하거나 병선이나 병력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에 더해 두 나라의 관계를 군신(임금과 신하)의 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후금의 요구에 조선 조정은 크게 분노했다. 차라리 후금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게 낫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1635년에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친 후금은 조선이 보인 태도를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그에 대한 대가로 왕자를 볼모로 보낼 것, 전쟁을 주장했던 신하들 중 주동자를 체포하여 보낼 것을 요구했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청의 임금 태종은 1636년 12월에 13만여 명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왔다. 조선군은 산성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쳤지만 청의 선봉군은 불과 10일 만에 한양 근처까지 도달했다.

    당황한 조선 조정은 왕자들을 강화도로 피난시켰지만, 정작 임금인 인조는 길이 끊겨 어쩔 수 없이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던 남한산성에는 겨우 50일분의 식량밖에 없었다. 청의 군대는 남한산성을 완전히 포위한 채 시간을 보냈다. 조선 조정은 명에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청과 싸움에서 계속 밀리고 있던 명은 구원병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 출동했던 명의 수군도 풍랑을 만나 되돌아갔다. 조선 각지에서 관군과 의병들이 남한산성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그마저도 모두 청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인조와 조선 조정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결국 청에 화해를 청했다.

    조선은 인조가 직접 청 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 절차를 거쳐 청과 강화를 맺었다. 그리고 청이 요구하는 강화 조건을 모두 받아들였다. 소현 세자와 둘째 왕자인 봉림 대군을 청에 볼모(인질)로 보냈고, 청에 조공을 바쳤으며, 예를 갖추기 위한 사신을 파견하고, 청이 전쟁을 할 때 군사를 보내기로 약속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병자호란 - 조선 중기에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해 일으킨 전쟁 (한국사 사전 2 - 역사 사건·문화와 사상, 2015. 2. 10., 김한종, 이성호, 문여경, 송인영, 이희근, 최혜경, 이승수)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 뒤 조선과 후금은 조약을 맺고 형제의 나라로 평화롭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뒤 후금은 명과의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자 조선에 조공을 강요하고 군신의 관계를 요구합니다. 후금은 청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고, 관계가 더욱 악화된 청과 조선은 전쟁을 하게 됩니다.

    청은 1636년 12월에 13만여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치러 왔습니다. 청의 군대는 10일만에 한양 근처까지 도달하게 왕은 신하들과 남한산성으로 들어갑니다. 끝내 조선은 청에 항복하고 청이 요구하는 모든것을 받아들이는 굴욕 강화를 맺게 됩니다. 소현 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고, 조공을 바쳤으며, 청이 전쟁을 할때 군사를 보내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준비는 하지 않고 호기만 부리다가 굴욕을 당하게 된것이지요.

    병자년에 오랑캐가 일으킨 전쟁이라는 뜻에서 ‘병자호란’이라고 한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인조, 서인정권의 청 군신관계 요구 거절, 2. 이괄의 난으로 인한 북쪽 국방력의 약화 가 대표적입니다.


    이 결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가 결국 40여일만에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됩니다.

    (* 삼배구고두례 즉,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 예를 행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김태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은 1636년부터 1637년까지, 만주족의 몰락 이후 한반도 지방의 후금족과 후진족이 공격하여 일어난 전쟁입니다.

    이 전쟁의 역사적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있습니다.

    첫째, 만주족의 몰락: 1616년 후진족이 만주족을 정복하면서 만주족은 천연기념물인 대장산(大長山)으로 퇴각하였습니다. 만주족은 그 후 대장산에서 후진족을 비롯한 주변 지방을 30년간에 걸쳐 공략하며 점차 강력해졌습니다.

    둘째, 지리적인 이유: 후진족이 제어하고 있던 훈민정음의 판본이 한반도에 퍼져나가면서 만주족은 한반도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높였습니다. 만주족은 한반도의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강화하려는 이유에서 한반도에 대한 지식을 확보하기 위해 출정을 계획했습니다.

    셋째, 정치적 요인: 조선은 명과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침략을 당하면서도 명에 대한 공격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주족이 강력해지면서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형편없게 바꿀 가능성이 있었으며, 조선은 만주족의 침략을 방지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비를 갖추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만리장성은 한반도를 향해 진격했고, 전쟁은 다수의 희생자와 소유자산의 손실을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최종적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만리장성의 침입을 막아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어난 일본의 침략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일본의 토요타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대륙 정복을 목표로 하는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추진하면서 일어났습니다.

    한국은 당시 중국의 속국인 조선으로 일본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고구려와 백제를 이끌었던 용무사(龍武士)들을 보호하였고, 이에 대해 일본은 먼저 조선에게 침공하여 병자호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전에 일어난 이순신 장군의 담화와 함께 이순신의 장군 생애를 다룬 영화 ‘명량’에서 이 사건이 그려져 유명해졌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27년 후금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나라 관계는 일단락 됩니다.

    한편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 이후 중강과 회령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했고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므로 변방의 백성과 변방 수장들의 괴로움이 컸습니다.

    이러한 후금의 파약행휘로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고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정묘호란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의 의로 개약하자고 요청하고 황금, 백금 1만냥 , 전마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와 정병 3만까지 요구합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고 화의 조약을 무시하고 후금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며 1636년 2월에는 용골대, 마부태 등이 후금 태종의 존호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씨의 문상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됩니다.

    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를 극간하는 이가 많아 인조도 이에 동조해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했습니다.

    조선의 동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낭패했음을 간파하고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했는데 도망치던 중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되고 이로 인해 후금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그들도 비로소 명확하게 알수 있게 되었고 재차 침입을 결심합니다.

    같은 해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이라 했으며 태동은 관온인성활제의 칭호를 받습니다.

    그는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하니 이와 같은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는 척화의지가 고조되고 있는 조선 조정에 받아들여질리가 없었습니다.

    그 해 11월 심양에 간 조선 사신들에게 그들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재차 침입해왔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