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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5.19

구한말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이유는 무엇입니까

구한말 고종 시대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는데요 상당히 놀라운데요 교과서에서도 얼핏들은 것 같습니다 이런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와 배경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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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오군란 > 1882년 (고종 1년) 7월 23일 구식군대가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에 항의하면서 조선왕조에 대해 집단으로 일으킨 군란 입니다.

    배경 > 1876년 일본제국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은 조선왕조는 문호르 개방하게 되었고, 양곡 수출에 대한 조항으로 인해 조선의 쌀이 대량으로 일본에 유출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조선 조정은 기존의 오군영을 무위.장어의 2명으로 통폐합하고 일본 후원하에 별기군 이라 불리는 신식 군대를 창설하여 일본인 교관인 일본 육군 소위 호리모토 레이조와 일본 육군 하사관 조교의 지도 아래 훈련을 실시 하였습니다. 그러나 2명의 군인들은 별기군에 밀려 차별 대우를 받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급료조차 제때 지급받지 못하는 상황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에 군인들은 일본의 후원을 둥에 업은 별기군과 그들을 우대하는 조정에 대해 반감을 품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박민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된 계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민씨 척족정권에 대한 대원군 중심의 수구파 정쟁으로 보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시각 하나로 접근하기 보다는 좀 더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종을 비롯하여 민씨척족정권들이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이나 구미제국과 함께 교섭 통상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로써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이 점차적으로 심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개화파 관료가 제도 개혁에 따라서 대거로 등장하게 되자 수구파의 반발이 더 거칠어지기 시작했고 특히 5영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무의 장어 2영을 설치하면서 별기군을 창설하는 군제 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 당시에 구 5영 소속의 군병들의 불만이 날이 갈수록 커졌다고 해요.

    1881년 전개되었던 수구파의 위정척사론과 이재선, 안기영과 같은 자들의 토왜반정음모사건을 계기로 하여 민씨척족정권이 대원군파와 특히 남인 계열의 수구파와 기존에 보기 힘들었던 규모의 탄압을 겪게 되면서 지배층의 분열이 극도로 달하게 되었고 이외에도 민씨척족정권의 인사행정의 문란, 매관매직, 관료층 부패, 일본의 경제적 침략 과 같이 여러가지 사건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게 되면서 임오군란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임오군란이 일어나기도 전에 많은 군병들의 불만이 극도로 치달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군제 개혁이 일어난 뒤에 구 5영 소속의 군병들이 대부분 그 직업을 잃게 되었고 신설된 별기군에 의해서 그나마 남아있던 군병들의 환경 역시 열악한 상태였다고 해요. 또 구 5영 소속이었던 군병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못하고 13개월이나 군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그들은 군로 관로였던 선혜청당상 민경호와 전 당상이었던 경기 관찰사 김보현에게 원한을 품게 됩니다.

    1882년 전라도조미가 당도하게 되자 구훈련도감 군병들에게 한달치에 해당하는 군료를 주긴 했지만 이미 밀려있었던 양에 비해서는 턱없이 모자라고 그마저도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고 한달치 보다 양이 반이나 모자랐기 때문에 그들의 민심을 잠재울 수 있을리가 없었다고 해요.

    결국 포수였던 김춘영과 유복만 등이 선혜청 곶기와 무위영 영관에게 이에 대한 항의를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시비가 더욱 심화되었고, 다른 군병들도 그들의 편을 들면서 함께 항의하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당시 궁중에 있었던 민겸호가 이 소식을 들은 다음 주동자들을 거두어 포도청에 가두어 버렸으며 고문을 가한 뒤 처형하게 되는데, 이 소식에 분노하게 된 군병들이 경분하여 통문을 발송하였고 결집하여 싸울 것을 호소하게 됩니다.

    마침내 이것은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군병들은 민경호의 집을 습격하여 행동방침을 결정하기 위해서 대원군과 함께 손을 잡고 그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 당시 대원군이 군병 대포자들에게 어떠한 지시를 내렸는지 그 자세한 내용이 지금까지 전달되는 것은 없지만 전반적인 흐름과 행동을 보았을 때 전해에 있었던 이재선의 거행 계획이 실행되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또 대원군의 심복이었던 허욱이 군병으로 변장 한 뒤 군란을 지휘하기도 했으며 군병들은 경기감영의 무기고를 공격한 다음 포도청에 난입하여 붙잡혀있던 동료들을 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화도조약 이래 민씨일파와 그 추종자들의 자주성 없는 대일정책은 국내 인민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유생들의 위정척사론을 대두시켰다. 그리고 위정척사의 상소와 그것에 대한 민씨정권의 탄압책은 대원군의 재등장을 기대하는 풍조를 자아내었다. 그러나 민씨일파를 비롯한 특권관료들은 뇌물과 매관매직으로써 점차 살쪄 갔으며 외국 상품에 자극되어 그 사생활은 사치를 극하였다. 더구나 일본과의 무역에서 주된 수입상품은 면포였다. 따라서 전통적인 면작 및 수공업적인 면직물 제조업이 쇠퇴하였다. 반면에 일본인이 조선에서 사모아 일본에 수출하는 것은 주로 쌀, 대두 등의 식량이었다. 그리하여 국내에는 식량 위기가 조성되고 곡가는 강화도조약 이래 3~4배 급등하는 현상을 빚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곡가가 물가의 기준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물가상승은 도시경제의 구조를 뒤흔들어 놓을 뿐만 아니라 모든 물자를 시장을 통해 구입하여 생활하는 도시민, 특히 하층민들에게는 생계를 직접 위협하는 심각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일본과의 무역은 이익에 민감한 일부 특권상인들이 미곡의 수집․중계와 양화의 유통과정에서 성장하게 만든 반면, 도시 하층민들에게 집중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또한 개항 이후 일본세력의 침투에 따른 조선사회 내부의 변동은 하급 군병들에게 심각한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민씨 척족정권과 개화파가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군제개혁을 추진했는데, 구식 군대를 도태시키고 일본식 군사제도를 도입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출처:레포트월드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82년 6월 5일 무위영 소속 구훈련도감 군병들이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여 일으킨 사건. 모래가 섞인 쌀을 지급하던 관리들을 구타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민씨 정권 아래 각종 수탈을 받았고 생계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던 빈민과 5군영의 폐지와 13개월이나 급료가 지불되지 않은 하급군병이 민씨정권에 대한 투쟁을 촉발하여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졌다. 사태를 수습할 능력을 잃은 고종대신 대원군이 나서서 곧바로 정상적인 급료 지급을 약속하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서면서 폭동은 가라앉았으나 군병들은 소규모 부대를 이루어 활동을 계속했다. 대원군 정권이 들어서자 일본과 청국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즉시 군대를 파견했다. 서울에 들어온 청군은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해가는 한편, 군대를 몰아 서울 시내와 궁궐을 장악했다. 이에 군병과 서울의 빈민들은 청군에 저항하여 무기를 들고 곳곳에서 소규모 전투를 전개했으나 청군에 의해 군병의 집단적 거주지인 왕십리와 이태원이 진압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