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장군 흑치상지는 어떤 인물이었는지요?
백제의 장수 흑치상지는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부흥운동을 펼치다가 결국 당에 항복하여 당나라에서도 여러 공을 세웠으나 뒤에 반란에 연루되어 죽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시대 말기 백제의 장군입니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부흥운동을 펼쳐 군세를 떨쳤습니다.
그러나 전세가 약화되자 유인궤에 투항하였습니다.
당나라로 가서는 여러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나 주흥의 무고로 옥사한 인물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흑치상지 [黑齒常之]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마디로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인생을 살다 간 사람입니다.
자신의 눈으로 백제가 망하는 걸 지켜보고 백제부흥군에 가담했다가 변심해서 자신의 옛 동지를 자기 손으로 처단하고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이방인같은 인생을 살다 갔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흑치상지는 서부(西部)출신으로서 키가 7척(175cm?)을 넘었으며 날쌔고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다. 벼슬은 제2품인 달솔(達率)에 이르렀고, 풍달군(風達郡) 군장(郡長)을 겸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발견된 묘지명(墓誌銘)에 따르면, 흑치상지는 백제 무왕(武王) 31년(630)경에 태어나 서기 689년(永昌 원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선조는 원래 부여씨(扶餘氏)였는데, 흑치(黑齒)지역에 봉해졌으므로 성씨를 흑치로 바꿨다고 한다. 증조부의 이름은 흑치문대(黑齒文大), 조부는 흑치덕현(黑齒德顯), 아버지는 흑치사차(黑齒沙次)이며, 흑치상지의 어릴 적 이름은 항원(恒元)이었다.
서기 660년에 백제의 사비성이 신라·당 연합군에게 함락 당하고 의자왕이 항복하자 흑치상지도 역시 항복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군대가 의자왕을 가두고 노략질하자 흑치상지는 임존산(任存山: 지금의 예산)에 의지하며 군사를 모아 당나라 군대에 대항하였다. 저항 초기에는 신라와 당에게 빼앗겼던 200여 성(《삼국사기》 <흑치상지열전>)을 회복하는 등 많은 성과를 올렸지만 결국은 유인궤(劉仁軌)에게 항복하였으며, 오히려 백제의 부흥운동세력을 공격해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당나라 조정의 신임을 얻었다.
흑치상지는 당나라로부터 인덕(麟德: 664~665) 초년에 절충도위(折衝都尉)라는 벼슬을 받고 웅진성(熊津城)에 주둔하였다. 함형(咸亨) 3년(672)에는 공적에 따라 충무장군(忠武將軍), 행대방주장사(行帶方州長史)에 임명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사지절(使持節), 사반주제군사(沙泮州諸軍事), 사반주자사(沙泮州刺史)로 승진하고 상주국(上柱國)을 제수 받았다. 이후 좌령군장군(左領軍將軍) 겸 웅진도독부 사마(熊津都督府司馬)가 되었으며, 부양군(浮陽郡) 개국공(開國公)과 식읍(食邑) 2천 호(戶)를 더 받았다.
이어서 서기 678년경에는 돌궐과의 전투에 조하도경략부사(洮河道經略副使)로 참가해 공을 세우고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이 되었으며, 다시 좌응양위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 연연도부대총관(燕然道副大摠管)에 임명되었다. 684년에는 서경업(徐敬業)의 모반을 평정하여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과 검교좌우림군(檢校左羽林軍)으로 승진하였다. 687년에는 연연도대총관(燕然道大摠管)으로서 돌궐을 쳐서 공을 세워 겸국공(兼國公=燕國公)과 식읍(食邑) 3천 호를 받고 그리고 다시 우무위위대장군(右武威衛大將軍) 신무도경략대사(神武道經略大使)라는 벼슬을 받았다.
그 뒤 회원군경략대사(懷遠軍經略大使)로 자리를 옮겨 찬보벽(爨寶壁)과 함께 돌궐을 토벌하였다. 이때 찬보벽이 혼자 무리하게 돌궐을 공격하여 크게 패하였는데, 흑치상지도 이에 연루되어 공이 없어졌다. 그리고 측천무후 때인 서기 689년에 혹리(酷吏)로 유명한 주흥(周興) 등의 무고로 조회절(趙懷節) 등의 반란에 연루되어 죽었다. 교수형을 당했다고도 하고 자살했다고도 하는데, 사형이 확정된 죄인의 신분으로 감옥에서 자살하였으므로 달리 전하는 듯하다.
죽은지 10년째인 698년에 맏아들 흑치준(黑齒俊) 등의 노력으로 억울함이 인정되어 죽기 전의 관직인 좌무위위대장군(左武威衛大將軍) 검교좌우림위(檢校左羽林衛) 상주국(上柱國) 연국공(燕國公)을 되찾았다. 그리고 영혼을 위로하는 뜻에서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을 더해주고 훈봉(勳封)은 옛날 그대로 복구하였다.
출처 :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56452&cid=40942&categoryId=33375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공을 세워 좌응양위대장군, 연연도부대총관을 지내다가 684년 11월 4일 강남도대총관이 되어 서경업을 토벌한 공으로 연국공 식읍 3천호에 봉해지면서 우무위위대장군, 신무도경략대사에 임명되고 예전 벼슬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수공2년 돌궐의 골돌록이 하동도를 공격하자 흑치상지는 좌응양위대장군 연연도부대총관이 되어 양정에서 2천 기병을 거느려 돌궐군 3천을 상대로 승리하고 흑치상지는 연국공 식읍 2천호의 작에 봉해졌습니다.
수공 3년 돌궐은 다시 당의 삭주를 침공했는데, 흑치상지는 이때 우무위위대장군으로서 신무도경략대사로 채워져 이다소, 왕구언 등을 부장으로 거느리고 돌궐과 전투, 황화퇴에서 돌궐을 크게 쳐부수고 다시 40여리를 쫓아 돌궐을 사막 쪽으로 몰아내는데 당시 우감문위중랑장이던 찬보벽이 조정에 표를 올려 돌궐 잔당을 마저 칠 것을 청했고, 측천무후도 흑치상지에게 다시 항원군경략대사로 찬보벽과 함께 군을 합쳐 함께 돌궐을 쫓게 했는데 찬보벽은 공을 탐내어 흑치상지와의 사전회의도 없이 홀로 진격해 당군 1만 3천명이 궤멸당하는 피해를 입었고, 흑치상지가 당의 무장으로 복무하면서 있던 처음이자 마지막 패전이었습니다.
이 패전 책임을 물어 찬보벽은 처형당하고 대장 흑치상지도 심문받던 도중, 혹리 주흥 등이 치상지가 응양장군 조희절과 짜고 반역했다고 모함하는 바람에 투옥당하고 689년 옥에서 스스로 목을 매 사망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흑치상지는 삼국시대 백제의 달 솔로, 풍달군장을 역임한 관리이자 장수입니다 백제가 멸망시 항복 했으나 당나라 군의 약탈의 분개하여 족장 10여명과 함께 임존성을 근거지로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한 때 기세를 떨쳤지만 다시 항복한 후에 당나라 편에 서서 임존성의 함락을 도운 후 당나라에 가서 무관이 되었고 부흥 운동 종식 후 웅진도독부의 군장이 되었다가 신라의 공격으로 도독부가 소멸되면서 당으로 돌아갔으며 토번과 돌궐을 치는데 공을 세워 귀족 작호까지 받았으나 측천무후때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무고로 옥에 갇혔다가 자결하였다고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제 31대 의자왕 때의 장군.
지략이 있어 달솔 겸 풍달군장이 되었다가, 가 망하자, 귀실복신과 협의하여 임존성에서 백제 부흥운동에 힘썼음.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흑치상지는 백제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의 건의로 당나라로 건너 갑니다. 당나라에서 무장으로 기용되는데 당군이 토번군에 당하고 잇을때 흑치상지가 기습을 해서 토번군을 무찌릅니다. 당나라 신임을 받은 흑치상지는 계속해서 공을 세우고 엄청난 승진을 하게 됩니다. 당나라의 제도인 번장 (한족이 아닌 이민족들도 공을 세우면 승진을 시켜주는 당나라 제도)이라는 제도 때문에 가능했죠. 나중에는 돌궐족까지 무찌르고.. 하여튼 30년동안 전쟁을 누비면서 한번도 패한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후 당나라의 12번째 안에드는 최고 장군까지 오르자, 측천무후세력들은 흑치상지의 세력이 막강한걸 두려워해서 역모죄로 흑치상지를 죽입니다. 나중에 흑치상지의 아들 흑치준의 노력에 의해 누명은 벗겨지고 중국 제일의 명당으로 황제나 고관대작이 아니면 묻히기 어려웠던 묘지터인 북망산에 묻힙니다. 라는 답변을 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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