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탬버린
탬버린23.01.29

교회에 돈을 내는문화는 왜생겼나요?

교회를가면 그냥 돈도내고 봉투에도 내고 다양하게 다양한방법으로 돈을 내던데 그걸왜내는것이고 언제부터 생겨난 문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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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십일조(十一租, 영어: tithe)는

    종교 단체를 지원할 목적으로 납부하는 수입의 10분의 1을 가리킨다.

    오늘날 십일조는 일반적으로

    자발적으로 납부하며 현금, 수표,

    주식으로 낸다. 반면 역사적으로

    십일조는 농작물 (땅에서 자란 것이나

    나무의 열매) 같은 종류의 것으로 냈다. 이러한 조세는 이미 고대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중세를 거쳐 근세 초기에까지 존속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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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1.29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교회도 하나의 조직이기 때문에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들어갑니다.

    교회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급여도 줘야 하고 각종 공과금 등도 일정하게 지출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내는 헌금은 강제적인 성격을 가진 것보다는 일종의 믿음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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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교회의 헌금문화는 고대부터 있던것이지요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어떻게 헌금을 해야 하는지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예를들면 십일조라든가 부자와 가난한자가 어떻게 헌금해야 하는지도 자세히 적어 놓았습니다 헌금의 액수가 중요한게 아니라 마음의 정성을 보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마음에 원하는대로 헌금하면 되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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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에게 제사를 지내는 과정에서

    추수한 곡식을 제물로 바치는 것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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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십일조란 무엇입니까? 일부 사람들은 십일조란 “총수입의 십분의 일”을 종교적인 목적으로 바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십일조를 계산하는 방법이 종교마다 다르지만, 많은 교직자들은 십일조를 바치도록 적극 권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의 한 가톨릭 사제는 “우리가 십일조를 바치도록 더욱 강조하지 않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 교회’는 하느님의 벗이 되어서 궁핍을 피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한 잡지에서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기 시작하려면, 먼저 십일조를 바치라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도둑질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그 기사는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십일조를 바칠 것을 요구하십니까? 그 점에 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알면 놀랄지 모르겠습니다.

    십일조의 기원과 모세의 율법

    십일조를 바치는 일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전체 율법의 일부였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는, 땅을 기업으로 받았고 자신들의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3번째 지파인 레위 지파 사람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지도 않았고 또 자신들의 생업에 종사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오직 성전을 위한 봉사에만 임명되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성전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고 또 성전의 경비, 보수, 유지 등 오로지 영적인 일에만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열 두 지파에게 각 소출의 십분의 일을 떼어서 레위 지파의 생계를 위해 그들에게 주라고 명한 것이 바로 십일조의 기원입니다. (민수 18:21-24) 이스라엘인들은 농사를 짓는 민족이었으므로 십일조를 현금으로 내는 일이 요구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땅의 소출과 늘어난 가축에서 취하여 십일조를 바쳐야 했습니다. 만약 소출의 십분의 일을 돈으로 환산하여 바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소출의 가치에 20퍼센트를 더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레위 27:30-33.

    십일조를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만일 어느 이스라엘인이 실수로 십일조로 내려고 했던 것의 일부를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면, 그는 보상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상하여야 했습니까? 20퍼센트를 더 바치고 자기의 범과에 대한 속가로 동물 희생을 바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레위 5:14-16.「공동번역」참조.) 이스라엘인들 모두가 다 제사직에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십일조를 바침으로써 누구나 그 제사직 봉사를 지원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십일조를 바치라는 하느님의 법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요구는 그 고대 민족의 환경에 매우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사람들의 환경에도 적합한 것입니까? 더욱 중요한 질문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를 바치라는 명령 아래 있습니까?

    법의 변경

    예수께서 부활되신 지 몇년 후, 할례받지 않은 비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습니다. 일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도 “할례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사도 15:5) 그들과 상반된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사도들과, 다른 경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하기를 원하였던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십일조를 포함한 모세의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셨습니까? 하느님께서 비유대인들을 대하시는 일에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경험들이 설명되었고, 그 점이 하느님 자신의 예언의 말씀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사도 15:6-21) 어떤 결정이 내려졌습니까?

    그 회의는 만장 일치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모세의 율법 을 짐지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종해야 할 몇 가지 “요긴한 것 들”이 있었습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까? 영감 받아 결정 된 사실을 인용하면 이와 같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메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찌니라.” (사도 15:25, 28, 29) 흥미롭게도, 십일조를 바치는 일에 관한 하느님의 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긴한 것들” 가운데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과 맺은 하느님의 율법 언약이 예수의 죽음으로 폐지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손으로 쓴 문서를 지워 버리셨습니다. 그것은 법령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우리를 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형주에 못 박아 없애셨습니다.” (골로새 2:14)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런 법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법이 변경되었으며, 이제는 “그리스도의 법”이 관련된다는 것입니다.―갈라디아 6:2; 히브리 7:12.

    “...하느님께서는 ... 손으로 쓴 문서를 지워 버리셨습니다. ...

    그분은 그것을 형주에 못 박아 없애셨습니다.―골로새 2:13, 14.

    “우리는 우리를 얽매던 율법에 대해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풀려났습니다,”―로마서 7:6.

    사도 바울은 이러한 법의 변경과 일치하게 생활하였습니다. 교회를 하나씩 하나씩 설립하는 일에 열심히 수고하였지만, 그는 결코 십일조의 형태로 돈을 바치라고 간청하지 않았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는 시간제로 천막 만드는 일을 하여 기꺼이 자신의 비용을 충당하였습니다. (사도 18:3, 4) 그는 아주 정직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 손으로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였노라.]” (사도 20:34)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는 일에 대한 어떠한 지침이 있습니까? 있다면 얼마나 주어야 합니까?

    그리스도인의 주는 방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지상에서 살았던 사람들 중 가장 관대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세워 놓으신 본은 많은 사람들이 관대하게 행동하도록 고무하였습니다. 그분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누가 6:38) 여기에 보면 제한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관대하게 주라는 격려를 받고 있습니다. 할 능력이 있다면, 십일조보다도 심지어 더 많이 바칠 수도 있습니다. (누가 18:22; 사도 20:35) 한편, 어떤 그리스도인에게 아마 사고나 병 때문에 갑자기 돈이 긴급하게 필요한 경우가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기 봉급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은 자기 가족의 생필품을 앗아가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행위는 비그리스도교적일 것입니다. (마태 15:5-9; 디모데 전 5:8) 그리스도인의 주는 일은 남의 눈치를 보는 것이거나 어떤 압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진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각 개인의 생활 환경이 다르다는 것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린도 후 8:12.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주어야 합니까? 그것은 개인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입니다.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깊이―미리 정해진 십일조 방식이 아니라―에 따라 얼마나 줄 것인지를 결정할 일입니다. 성서에서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권고하는 바와 같습니다. (고린도 후 9:7)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이스라엘의 성전 제사직을 지원하기 위한 모세의 율법 언약의 마련이었습니다. 즉 한 지파의 생계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요구받는 것과는 목적이 틀린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십일조를 요구하는 성경의 법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헌금은 전적으로 자신의 환경에 맞게, 그리고 자진적이어 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정확한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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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는 매우 의미심장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예언된 “마지막 때” 즉 심판이 임박한 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수백 가지의 예언이 들어 있지만 단 한 번도 어긋남이 없이 모두 정확히 성취됐습니다. 이미 성취된 예언에 대해 알아보신다면 틀림없이 매우 놀라실 겁니다. 이제 조만간에 성취될 예언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예언은 바로 심판 예언입니다. 이제 조만간에 창조주께서 인간사에 개입하셔서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큰 심판을 집행하실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심판은 전혀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도 기쁘고 너무나도 행복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심판의 대상이 오직 악인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37:9, 10; 잠언 2:21, 22; 마태 25:46) 모든 악과 악인이 사라지고 이 땅의 모든 오염이 제거되는, 새롭고도 놀라운 낙원과 같은 세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세상이 곧 올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약속이 아닙니다. 이것은 창조주의 약속입니다.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우리의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당신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을 당신에게 부지런히 보내시어 성경을 통해 심판이 있어야 하는 이유와, 심판때 악인의 대열에 끼지 않는 법을 알려 주십니다. 과거 성경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점을 알리시기 위해 자신의 백성을 "집집으로" 보내셨습니다. (마태 10:7; 누가 8:1; 10:3-11; 사도 5:42; 20:20)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그분은 자신의 백성을 당신에게 부지런히 보내고 계십니다. 하지만 무한정 그렇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시대는 성경에 예언된 “마지막 때”이기 때문이고 그때까지만 전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누군가 문을 두드렸는데 그냥 보낸 적이 있습니까? 아마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일 것이며,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성경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혹시 그들이 방문하면, 그냥 보내지 마시고 꼭 대화를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사랑 많은 창조주 여호와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보내신 마지막 사람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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