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성황후는 민씨집안의 딸로서 흥선대원군의 선택을 받고 고종의 정실 비가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 기 외척의 득세와 왕실의 핍박을 온몸으로 겪어왔기에 그럴 가능성이 적은 비고적 한미한 가문이 민씨집안을 골랐습니다.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을 멀리한 결과이지요.
고종의 비로서 민비는 그 이전 왕비와는 달리 정치적인 색채를 갖고 움직임을 보이는데, 그 시기는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끝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는 1873년부터입니다. 이때부터 민비와 민씨세력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전환하여 적극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자합니다. 임오군란으로 민씨세력이 타격을 받았을 때에는 충주로 피신해 청에 도움을 요청하고, 청이 대원군을 압송해 민씨세력은 재복궈하게 됩니다.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이 진출하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진 후 민비는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이 낭인들을 궁으로 보내 민비를 제거하고 불에 태우는 만행 을미사변을 일으켰습니다.
고종은 결국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고 다시 궁에 들어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국임을 선포하는데, 이에 따라 민비는 명성황후로 추증됩니다.
구한말 격동의 시대를 헤처나가는 강인한 국모였지만 시대의 희생양이 된 것입니다. 그녀의 정치적 행위가 어떤 평가를 받는지는 차치하고라도 국모와 여성으로서는 비극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