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국에서도 수학이라는 학문이 있었나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궁궐을 짓거나 사찰, 첨성대 등을 지을때, 주먹구구식으로 짓지는 않고,
뭔가 수치나 규격을 대입했을것 같은데,
이때 기하학이나 수학 역할을 하는 학문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통일신라 이전의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수학에 관해서 직접 알려주는 문헌은 없으며, 다만 간접적인 자료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정도에 그칩니다. 고구려에서는 373년(소수림왕 3) 중국의 제도를 본뜬 율령정치가 성립되었으며, 이에 따라 과세가 실시되었고 왕실의 출납을 관리하는 주부(主簿)라는 관직도 있었습니다. 또 소박하나마 과세를 위한 농지측량도 실시되었습니다. 중국적인 관료조직 아래서의 이러한 행정상의 실무와 관련, 계산업무에 종사하는 관리가 있었음에 틀림이 없고, 이들은 중국 수학책을 통해 다소나마 체계적인 계산지식을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또, 『삼국사기』 중의 114년(태조왕 62) 이래 554년(양원왕 10)까지의 사이에 있는 11번의 일식기사는 역 계산을 포함한 조직적인 천문관측활동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으며, 따라서 역법과 관련 있는 분야에서도 수학지식이 필요하였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백제는 제8대 고이왕 당시 이미 중국식의 관제가 도입되었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260년(고이왕 27) 봄 4월에 재정회계와 창고를 각각 담당하는 관리가 임명되었습니다. 이 밖에 수학지식을 필요로 하는 관서로 점성 외에 역 계산의 업무를 포함하는 일관부(日官部)와 시장의 관리 및 도량형의 통제를 관장하는 도시부(都市部)가 있었습니다. 『삼국사기』는 기원전 13년(온조왕 6) 이래 592년(위덕왕 39)까지 26회에 걸쳐 백제의 일식기사를 싣고 있습니다. 중국의 문헌인 『신당서(新唐書)』와 『주서(周書)』에도 백제 역법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입니다. “백제는 서적을 갖추고 있으며, 중국인처럼 역을 엮었다.”, “송나라의 원가력을 사용하여 1월을 연초로 삼는다.” 간접적이나마 보다 자세한 백제의 수학을 짐작할 수 있는 일본의 문헌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일본 긴메이천황(欽明天皇) 14년(553)에 일본의 요청에 의하여 백제가 역서와 역의 천문학자를 파견한 적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비롯하여 『일본서기』에 실린 당시의 기사는 고대 일본의 역법과 수학이 백제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이어 701년(효소왕 10)의 대보령(大寶令), 718년(성덕왕 17)의 양로령(養老令)이 반포되어 중국의 율령제도를 정식으로 수용하게 되는데, 여기에 포함된 산학제도(算學制度)가 당나라 명산과(明算科)의 내용을 반영하게 된 것은 당연하지만 수학교과서의 내용은 중국과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때의 일본 산학의 교과서는 『손자산경(孫子算經)』 · 『오조산경(五曹算經)』 · 『구장산술(九章算術)』 · 『육장(六章)』 · 『철술(綴術)』 · 『삼개중차(三開重差)』 · 『주비산경(周祕算經)』 · 『구사(九司)』로 되어 있으며, 이 중에는 당나라의 명산과에 없는 『육장』 · 『삼개』 · 『구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국의 수학책을 재편집한 것으로 보이는 위의 세 교과서 중, 『육장』과 『삼개』의 이름은 그 뒤 통일신라의 산학제도에도 나타납니다. 고대 일본의 야마토왕조(大和王朝)는 산학을 국학(國學)에 소속시키고, 천문 · 역법을 음양료(陰陽寮)에서 교수하는 등 형식적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이 제도의 운영이 백제계 귀화인 및 그 후손들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중국제도에 없는 수학교과서의 출현은 백제 수학의 영향으로 보는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삼국사기』에 있는 “점해이사금 5년(251) 정월에 왕은 한지부(漢祗部)의 부도(夫道)라는 사람이 빈한함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아첨함이 없고 공(工) · 서(書) · 산(算)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므로 아찬(阿飡)의 관직을 주어 창고직을 맡게 하였다.”라는 기사가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에 관한 유일한 수학관계 문헌입니다. 그러나 공물 · 조세를 담당하는 조부(調部)가 584년(진평왕 6), 그리고 조세와 창고를 맡는 창부(倉部)가 651년(진덕여왕 6)에 설립되었고, 이보다 일찍이 5세기 말(490)에 시장의 관리기관인 시전(市典)이 설치되었으며, 이 관서가 도량형의 제정을 비롯한 물가의 통제 및 매매에 따르는 세금징수를 하였다는 사실은 신라의 관료조직 속에 계산에 능한 기술자가 배치되어 있었음을 뜻합니다. 실제로 최근 1933년 일본의 쇼소인(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의 민정문서(民政文書)에는 4개 촌락에 관한 주위 사방의 거리 · 호수 · 인구 · 전답면적 · 가축수 · 뽕나무수 등이 기록되어 있어 회계관리의 업무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가 산학제도를 가지게 된 것은 한반도 통일 이후의 일이며, 원시적인 셈이 아닌 체계적인 수학지식이 우리 사회에 등장하게 된 것은 중국계의 율령정치와 관련된 정치산술로서였습니다.
따라서 고대삼국이 중국의 정치체제를 본뜬 행정조직을 도입하면서 수학지식에 관해서도 그 나름의 흡수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겠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수학책이 도입되었으며 그것들이 어떤 계층에서 어떻게 연구되었고, 또 어느 정도 보급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적어도 『구장산술』 정도는 이 시기에 이미 우리 나라에도 소개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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