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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6.04

조선의 승과 과거시험에는 무슨 문제들이 나왔었나요?

조선 스님들의 승과 시험은 무슨 주제의 시험이 나왔나요.

선비들 대상으로 한 과거 시험은 당연히 유학을 바탕으로 나오고, 문제들도 알려져 있는데요.

승과는 불교를 바탕으로 한 시험이 나왔나요?

조선은 유학의 나라라 어떤식으로 문제가 나왔을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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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승과에는 종선(宗選)과 대선(大選)의 구별이 있었다. 종선은 총림선(叢林選)이라고도 하였으며, 각 종파 내에서 실시하는 것으로 여기에 합격하면 대선에 응시하게 된다. 대선은 국가에서 행하는 것으로 선종대선(禪宗大選)과 교종대선(敎宗大選)의 구별이 있다. 선종대선은 주로 광명사(廣明寺)에서 선종(禪宗)의 승려에게 실시하였고, 교종대선은 왕륜사(王輪寺)에서 교종(敎宗)의 승려에게 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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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의 승과에는 불교 자체에 교종주3과 선종주4의 두 갈래가 있었던 만큼, 교종의 승려를 선발하는 교종선과 선종의 승려를 선발하는 선종선의 두 종류가 있었다. 교종선은 교종의 도회소(都會所)인 개성의 왕륜사(王輪寺)에서, 그리고 선종선은 선종의 도회소인 개성의 광명사(廣明寺)에서 각각 실시하였다.

    승과 합격자에게는 교종 · 선종의 구별없이 대선(大選)이라는 법계(法階 : 승려들에게 주어지는 품계)가 주어졌다. 이 대선을 시발로 하여 대덕(大德) · 대사(大師) · 중대사(重大師) ·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순으로 승진할 수가 있었다. 그 위로 교종계에서는 수좌(首座) · 승통(僧統), 선종계에서는 선사(禪師) · 대선사(大禪師)의 법계가 있었다.

    그리고 승통 또는 대선사에서 다시 오를 수 있는 지위는 국사(國師) · 왕사(王師)였는데 여기에는 교종 · 선종의 구별이 없었다. 이는 승려가 국가로부터 받는 최고의 영예직이었다.

    고려시대 승과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교종선과 선종선으로 나뉘어 3년마다 실시되었다. 『경국대전』 예전(禮典) 도승조(度僧條)에 “선교양종이 3년마다 시험을 실시하되 선종에서는 『전등록(傳燈錄)』과 『점송(拈頌)』을, 교종에서는 『화엄경』과 『십지경론(十地經論)』을 시험해 각각 30인을 뽑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승과(조선시대에는 승과를 일반적으로 禪科라고도 하였음.)에 합격하면 선 · 교의 구별없이 대선의 법계를 받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중덕(中德)을 거쳐 교종에서는 대덕 · 대사로, 선종에서는 선사 · 대선사로 각각 올라가게 되었다.

    승과가 조선 초기에 언제부터 실시되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세종실록』 1년(1419) 12월 임오일조를 보면 이 때 이미 실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억불숭유정책(抑佛崇儒政策)이 강화됨에 따라 성종 · 연산군 치하에서 승과는 일시 중단되었고 중종 때에는 폐지되었다. 그것은 당시 선 · 교양종을 주축으로 하던 불교 자체에 대한 철저한 탄압의 일환이었다.

    그 뒤 승과는 명종 대에 이르러 다시 논의되었다. 1550년(명종 5) 12월 명종은 선교양종의 본사(本寺)를 부흥시켜 선종은 광주(廣州 : 지금은 서울의 일부)의 봉은사(奉恩寺)를, 교종은 양주(楊州)의 봉선사(奉先寺)를 각각 본사로 삼고 아울러 3년에 한번씩 승과를 실시할 것을 공포하였다.

    이와 같은 조처에 조정 신하들은 물론, 성균관 및 그 밖의 유생들이 즉각적으로 들고일어나 복립양종선과사(復立兩宗禪科事)의 철회를 강력히 그리고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불교를 독신하던 중종의 비요 명종의 생모인 윤대비(尹大妃)가 정무를 독단하던 때였고, 또 보우(普雨)가 조정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서 전혀 효과가 없었다.

    이듬해인 1551년(명종 6) 6월 선종과 교종의 양종 선과를 다시 두고 승려에게 도첩을 주었다. 그러나 1565년 윤대비의 사망을 계기로 보우는 유배, 장살(杖殺)되고 양종과 승과 및 도첩제(度牒制)가 모두 폐지되었다. 임진왜란 중에 활약한 유명한 중 서산대사 휴정(休靜)이나 사명당 유정(惟政)은 다 위의 복구된 승과에 합격한 사람들이었다.

    그 뒤 승과가 언제 다시 복구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임진왜란 중에는 권시토적지술(權時討賊之術), 즉 토적을 위한 임시방편으로 참급자(斬級者)에게 급선과(給禪科), 즉 승과합격증을 주는 정책을 몇 차례 실시하였다. 그리고 이에 관한 지침으로 선과사목(禪科事目)이라는 것을 반포하기도 하였다.

    한편, 승과에 관한 『경국대전』의 규정은 조선 말기까지 변동없이 그대로 존속되었다. 그러나 실제 시행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승과 실시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 예컨대 모두 몇 회나 실시되었으며, 몇 명의 합격자가 배출되었는지 등의 문제에 관한 자료도 전하는 것이 없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승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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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승과 시험은 경국 대전에 의하면 3년마다 선시를 실시하고,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으로 그 절대의 경지를 보이고 수많은 보살들이 일어나 부처님의 한없는 공덕을 찬양한다는 내용의 < 화엄경> < 십자경> 등으로 시험을 출제 해서 30명을 뽑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교종시에 합격하면 중덕 - 대덕 - 대사 - 도대사의 순서로 승진하였으며, 대선에 합격한 자만이 주지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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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 승과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교종선과 선종선으로 나뉘어 3년마다 실시되었다. 『경국대전』 예전(禮典) 도승조(度僧條)에 “선교양종이 3년마다 시험을 실시하되 선종에서는 『전등록(傳燈錄)』과 『점송(拈頌)』을, 교종에서는 『화엄경』과 『십지경론(十地經論)』을 시험해 각각 30인을 뽑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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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시험과목은 선종은 전등록, 점송, 교종은 화엄경, 십지론을 보았으며 시험에 합격한 자에게 대선이라는 초급 법계를 주고 선종, 교종 구별없이 대덕, 대사, 중대사, 삼중대사까지 승진할수 있게 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와 같이 승과를 두었는데 선종은 선과, 교종은 교과라하며 선과는 선종의 종무원사인 흥천사에서 시행, 교과는 교종의 종무원사인 흥덕사에서 예조 관원의 입회하에 시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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