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중심을 왜 금관가야로 잡았나요?
안녕하세요? 백제와 신라 사이 껴있는 국가가 가야잖아요~ 근데 국가 중심이 아닌 신라쪽으로 치우쳐져 있더라구요~ 그럼 침략도 많이 당할거 같은데 왜 금관가야로 자리를 잡았나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3개의 답변이 있어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금관가야흘 건국한 수로왕은 변한 소국들을 통합하고 신라와의 대립에서 다섯 번의 승리를 거두었으며, 포상팔국과의 전쟁에서도 신라의 도움을 받아 승리하였습니다. 금관가야는 낙동강 하류의 평야 지대에 위치하여 해상 무역에 유리하였습니다. 따라서 중국, 일본, 백제와의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철광 자원과 제철 기술이 발달하고 철기를 생산하고 수출하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금관가야가 교역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양동리는 금관가야 중심지였던 긴해 도심에서 서쪽으로 약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해상무역에 종사했던 선박들이 정박했던 항구이자 물류거점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금관 가야의 명칭은 가야 시대에는 대가락이나 가락으로 불렸습니다. 현재는 금관가야라는 명칭이 널리 통용되고 있으며, 특히 고고학계에서는 소국 연맹 단계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는 김해 지역의 경우 3세기 후반대로 보고 있는데 금관가야는 철 생산과 교역의 거점 역할을 하며 번영했고 이 지역은 중국의 사신이 왜국으로 향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정학적 거점이었기에 금관 가야를 가야의 중심으로 봤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