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9

미얀마 아웅산 묘소 테러사건이 뭔가요?

안녕하세요.


미얀마 아웅산 묘소 테러사건이 뭔가요?


이 사건의 배경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그 시기는 언제인가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83년 10월 9일,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방문 중이던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의 암살을 시도한 북한의 폭탄테러.

    간혹 아웅山 묘소 테러로 잘못 알고 아웅이라는 산에 있는 묘소에서 테러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아웅 산은 사람 이름으로 미얀마의 독립운동가이자 국부이며 그의 묘소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버마 아웅산 암살폭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외국에서는 'Rangoon Bombing', 즉 버마의 수도 랑군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라 부른다.

    1970~1980년대는 대한민국과 북한에서는 제3세계 외교전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서로 상대방 국가와 단교하고 자기들과 수교를 요구하며 상대방 국가를 고립시키려고 시도하는 한편, 있는 돈 없는 돈 만들어가며 온갖 선물 공세를 하여 국제사회에서의 자국의 외교적 정통성과 국격, 위세 등을 인정받기 위한 양측의 소리 없는 공방전이었다.

    특히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서서히 대한민국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우위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대한민국은 이러한 우위를 바탕으로 더욱 더 적극적으로 외교전에 임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 때 미얀마는 제3세계 비동맹 국가였지만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던 국가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회주의와 비슷한 체제인 북한과 우호적인 외교 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 등 현실적인 이유로 이 시점에는 남한과의 관계 개선에도 많은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 전두환은 미얀마를 대한민국과 우호적인 국가로 확실히 만들기 위해 1983년 가을로 예정된 동남아·대양주 순방[4]에 미얀마를 첫 번째 순방국으로 지정하였다.

    사실 원래 순방 계획에는 미얀마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청와대에서 지시가 내려졌고, 기자들 앞에서 이범석 외무장관이 "그 개새끼 때문에 버마까지 가야 하게 되었군"이라고 욕설을 내뱉을 정도로 외무부는 당황스러워 했다고 한다. 이렇게 일정을 갑작스럽게 바꾸도록 지시한 사람은 당시 전두환 정부의 실세였던 쓰리허[5]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정부 핵심 관료들이 미얀마 방문을 반대한 것은 미얀마가 국력이 약한 나라인데다가 군사독재 국가의 특성상, 외교를 통해 막상 얻을 만한 실리나 국제적 위상이 부족하다는 것과 결정적으로 북한에 더 지지를 보이는 성향의 국가임을 감안할 때 우리와 정상 외교를 맺기에는 미흡하다는 것이 반대 의견의 주요 근거였다.

    또한, 북한에 의한 암살/테러 위협이 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반대 의견은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노신영과 외무부 장관이었던 이범석 등 세계 정세에 정통한 외교 관료 출신 핵심 참모들이 중심이 되어 피력되었다. 하지만 당시 대통령인 전두환은 북한과의 외교전에서 우위를 점하여 북한을 제3세계 국가들로부터 고립시키려는 목적이 강했다.

    2010년대에 KBS가 제작한 다큐에 출연한 당시 취재기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 집권 후에도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네 윈의 통치술을 배우기 위해 버마를 선택한 것이란 의견이 많이 돌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쓰리허 중 한 명이 전두환을 설득할 때 동원한 논리가 바로 그런 이야기였다는 모양새다. 신동아 1992년 6월호 기사 <전두환은 '네 윈'을 꿈꿨다(이상우 기자)>, 1993년 8월 13일자 중앙일보 <청와대 비서실(박보균 글)> '전씨 「나들이 병」 겹친 과잉 외교'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실제로 1981년 네 윈-우산유 대통령직 이양 이후 서열관계는 <88년 정권교체준비연구>란 문건에 나온 권력구도와도 유사했다. 때문에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순방을 추진하였다.

    1983년 10월 8일, 전두환을 비롯해 핵심 참모 및 관료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정부 수행원 일행은 서울을 떠나 양곤으로 향했다. 전용기가 무사히 양곤에 도착하고, 공항에서 당시 미얀마 대통령인 우 산유의 영접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영빈관에서 양국 정상간 대담도 나누는 등 첫날 순방 일정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미얀마 순방 결정까지 참모진의 반대 의견이 많았었지만, 당시 전두환 정권에서는 해외 순방이 워낙 많았고[6] 그때까지 별 탈 없이 잘 마무리되었기에 미얀마 순방 또한 평범한 해외순방으로 잘 마무리될 것으로 보였다.

    출처: 나무위키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29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웅산 묘소 테러사건은 북한이 1983년 10월 9일 당시 버마를 방문중이던 전두환 대통령 및 수행원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테러입니다.

    1970~1980년대 대한민국과 북한에서는 제3세계 외교전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로 서로 상대방 국가와 단교하고 자기들과 수교를 요구하며 상대방 국가를 고립시키려고 하는 한편 온갖 선물공세를 하여 국제사회에서의 자국의 외교적 정통성과 국격, 위세 등을 인정받기 위한 양측의 소리 없는 공방전이있었습니다.

    이때 미얀마는 제 3세계 비동맹국가였지만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던 국가로 상대적으로 사회주의와 비슷한 체제인 북한과 우호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었으나 경제 등 현실적인 이유로 이 시점에는 남한과의 관계 개선에도 많은 의욕을 보였고 이러한 점들을 감안, 전두환은 미얀마를 대한민국과 우호적인 국가로 확실히 만들기 위해 1983년 가을로 예정된 동남아, 대양주 순방에 미얀마를 첫 번째 순방국으로 지정합니다.


  • 1983년 전두환 대한민국 대통령께서는 6개 국가를 공식 방문하기 위해 떠났고, 그 첫 번째 나라가 버마(지금의 미얀마)였습니다. 버마에 도착한 전두환 대통령께서는 아웅산 국립 묘소에 참배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같이 간 관료들이 미리 줄을 서 있던 중 큰 폭발이 일어나면서 17명이 죽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웅산 테러 사건 > 북한이 1983년 10월 9일 당시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및 수행원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테러 사건 입니다.

    아웅 묘소 테러로 잘못 알고 아동이라는 산에 있는 묘소에서 테러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아웅 산은 사람 이름으로 미얀마의 독립운동가 이자 국부임 그의 묘소에서 발생한 사건 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버마 아웅산 암살폭발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1970~1980년대는 대한민국과 북한에서는 제3세계 외교전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 였습니다.

    서로 상대방 국가와 단교하고 자기들 수교를 요구하며 상대방 국가를 고립시키려고 시도하는 한편 있는 돈 없는 돈 만들어가며 온갖 선물 공세를 하여 국제사회에서의 자국의 외교적 정통성과 국격, 위세 등을 인정받기 위한 양측의 소리없는 공방전 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북한이 1983년 10월 9일에 미얀마( 당시 버어마)의 옛 수도 양곤에 위치한 아웅산 묘역에서 미리 설치한 폭탄이 터져 21명이 사망하고 수십여 명이 부상을 입은 폭탄 테러 사건으로 대한민국의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등 각료와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기타 수행원들이 부상당했던 테러 사건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