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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777
나무77723.12.03

강감찬은 문관인데 어떻게 거란의 3차 침입에서 대항해서 큰 승리를 이룰 수 있었나요?

고려시대는 문관도 무관 처람 전쟁에 참여 하였나요? 강감찬은 문관인데도, 무인처럼 행동 할수 있았던 것은 무엇때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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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0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 장군은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고하며 성종2년(983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습니다. 이 때 나이가 36세로 늦게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그 후 강조의 정변으로 젊은 현종이 즉위하고 나서는 출세길이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1010년(현종 1) 요나라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공하자 대세 의견인 항복을 반대하고, 홀로 몽진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으며 이러한 공을 인정 받아서 중추사에 올랐다가 곧바로 이부상서가 되었고, 현종 9년(1018)에는 서경유수와 내사문하평장사가 되었습니다. 현종 즉위 전까지는 중앙 정계에 그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지만 어느덧 승진하면서 문하시중 다음 가는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고 이후 죽기 직전에는 문하시중직까지 받았다고합니다. 또한 함경도 쪽으로 파견되어 동여진의 침입에 대비하기도했기에 늦게 출세하고 능력도 늦게 발휘된 전적을 보면 대기만성형 인물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1019년(현종 10) 거란의 제3차 침공 당시 서북면행영도통사였던 강감찬은 고려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거란 방어 작전을 진두지휘했으며 고려군 사령부의 무관들은 성공적인 기선 제압, 거란군의 전격전을 대비한 청야전술과 유격전, 귀주 대첩에서 보여준 포위섬멸전까지 철저한 작전 계획을 세워 완벽하게 실행함으로써 재침입을 해 온 거란군을 격퇴하는데까지 성공했습니다. 거란의 제3차 침공이 끝난 1020년(현종 11)에 강감찬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는데, 현종은 강감찬에게 지팡이를 선물로 주고 3일에 1번만 출근토록 명령했다고하니 강감찬은 고려시대 최고의 군주인 현종을 보필한 왕좌지재의 신하라 할 수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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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 장군은 983년 문과로 장원 급제하여 예부시랑으로 관직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거란의 2차 침입 당시(1010) 현종의 피난을 건의하였으며, 나주까지 파천하여 사직을 보호한 공으로 문하평장사와 서경 유수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차 침입시(1018)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로 임명하고, 군사 20만을 지휘하여 거란을 귀주에서 격퇴하였습니다.

    그런데 강감찬 장군에서 '장군'이라는 칭호는 3차 침입 당시 현종이 강감찬에게 '상원수'로 임명하여 귀주대첩을 승라로 이끌어서 입니다. 여기서 '상원수'는 임시 장군으로 비상시 임명하는 직책입니다. 그리고 고려는 상장군이 정3품으로 무신의 최고 관직이며, 대군에 대한 지휘권은 문신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강감찬 장군이 군인으로서 직무 기간은 3개월밖에 지나지 않지만 지휘권과 전쟁 승리라는 이유로 장권이라는 칭호를 훗날 붙여진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무관직은 상원수 이외 평생 문관이었으며, 문관 최고직인 문하시중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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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이든 조선시대이든 문관이 무관보다 우위에 있었던 적이 많으며

    이에 따라서 문관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활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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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감찬 장군은 고려시대 문관입니다. 983년(성종 3)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 한림학사를 거쳐 평장사가 되었습니다. 1010년(현종 1)에 강조정변을 빌미로 요나라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오자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임명하여 대적케 하였으나 크게 패하였습니다. 이에 조정 중신들은 항복하자는 의견이 대세였으나 강감찬은 전략상 후퇴를 건의하여 현종이 나주까지 피신함으로써 사직을 보호하였습니다. 하공진이 요를 설득시켜 군사를 물려 돌아가던 중 양규장군의 공습으로 많은 요나라 군사들에게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듬해에 국자제주가 되었고 1018년 경관직인 내사사랑 동내사 문하평장사와 외관직인 서경 유수를 겸하였습니다. 서경 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 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강감찬이 이 직에 임명된 것은 요나라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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