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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든 하나라도 배우자
언제 어디서든 하나라도 배우자23.06.27

이순신장군은 왜 백의종군 했나요?

역사적으로 임진왜란 최고의 군인은 이순신장군님인데요 전쟁중 백의종군을 하였는데 그 이유가 뭔가요? 정쟁의 희생양이 되었던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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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요시라 사건으로, 정유재란을 일으키기 전 이순신이 두려웠던 일본은 이순신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고니시는 요시라 라는 간첩을 통해 가토군이 어느 시기 바다를 건너온다는 내용을 흘리게 했습니다.

    이에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출전하라는 명을 내리나 일본군이 우리보다 많은 병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고 부산으로 잘못 나갔다가 적에게 포위될 수도 있고, 확실하지 않은 정보로 인해 일본의 계략에 빠져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 이순신은 선조의 말을 듣지 않고 출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시라가 얘기했던 그때 가토군이 정말 상륙, 이에 선조는 화가 났고 이미 전부터 원균이 이순신에 대해 좋지 않은 상소문을 조정에 올리고 있었고, 대신들도 이순신을 모함하며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순신이 거슬렸던 선조는 이를 계기로 이순신을 파직, 한양으로 압송했고 백의 종군을 받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을 2번 당했습니다.


    첫번째 백의종군은

    "녹둔도"에서 여진족 침입에 대한 문책

    여진족의 기습을 받게 되어 격퇴하였으나 이일의 무고로 파직되어 백의종군함


    두번째 백의종군은

    1597년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임금의 명을 따르지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이순신의 명성이라던가 이순신 장군한테로 쏠리는 민심이 위협이 됐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신하들이 이순신을 모함하니까 옳다구나 한 거겠죠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2번의 백의 종군을 당하셨는데요.

    첫번째, 녹둔도 에서 여진족 침입에 대한 문책 이었습니다.

    여진족의 기습을 받게 되어 격퇴 하였으나 이일의 무고로 파직되어 백의 종군 하셨습니다.

    두번 째, 1597년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라는 이유 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차 조선을 침략한 정유재란 때,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에게 출정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군이 우리보다 병력이 우세하여 부산으로 잘못 나아갔다가 적에게 포위될 수도 있었기에 출정을

    거부하여 관직이 파직되어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습니다.



  •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게 된 계기는 아래의 두가지 사건 때문이다.


    첫 번째는 부산 왜영 방화 사건. 이순신이 자신의 부하들인 안위와 김난서 등이 부산 왜영에 숨어들어서 적의 배와 장비들을 불태웠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렸는데, 이 보고 이후 이조좌랑이던 김신국이 이순신의 보고를 허위 보고라고 올린 사건이다. 이원익의 추가 보고와 의금부의 조사 결과, 이순신의 보고는 아래 부하들이 허위로 이순신에게 보고를 올림으로써 이순신이 왕에게 보고를 허위로 하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이게 이후에 이순신이 파직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다만 의금부의 조사 결과와 이원익의 추가 보고만으로 이순신이 거짓으로 조정에 보고를 올렸다고 하기에는 무리인 부분이 많은데, 조정에서도 분명 이순신의 부하가 이순신에게 허위 보고를 올려서 이를 그대로 알리다 보니 졸지에 거짓 보고를 하게 된 것이지 이순신이 의도적으로 허위 보고를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더 웃긴 것은 허위 보고를 올린 관계자들이 조사를 받았지만 막상 한양에 압송된 사람은 이순신밖에 없다. 정말 허위 보고를 추궁하고자 했다면 안위나 김난서까지 같이 압송되었어야 하는데 이들은 압송은 커녕 파직도 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의 파직이 결정됐을 때 선조는 자기 입으로 직접 부산 방화 사건은 안위와 김난서가 행한 일인데 이순신이 공을 가로챈 것이다 라고 언급함으로써 이순신의 부하들이 한 행동임은 인정하지만 은근슬쩍 이순신 잘못으로 몰아갔으니 사실상 허위보고 사건은 그냥 이순신을 떨어트리려는 명분에 불과하다.


    2번째는 가토의 도해. 얼마 전 일본의 이중간첩인 요시라로부터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었는데, 이 정보가 조정에 보고된 것이 1597년 1월 1일이다. 조정에서는 즉각 비변사에서 회의를 거쳐 이순신에게 출격 명령을 내렸는데, 이순신이 1월 6일부터 남해현에 공무차 들어갔다가 풍랑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상태였기 때문에 시간을 잡아먹다 보니 가토가 진작 바다를 건너서 부산에 도착해버렸다. 조정에서도 이를 파악하여 가토를 잡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혹시 추가로 있을 상륙 부대에게 압박을 주기 위하여 부산포로 출격을 명했고, 이순신은 69척의 함대로 부산포를 두들기며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통념처럼 무작정 출전 거부만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순신이 가토를 잡지 못했다고 책망하면서 "저라면 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한 원균의 장계가 조정으로 올라오고, 이와 더불어 이순신을 숙청하려고 이미 혈안이 되어 있던 선조에 의해서 싸우라는 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1597년 2월 26일에 이순신을 파직 및 압송하고 그 후임으로 원균을 임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