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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30

활이라는 무기는 언제부터 생겨났을까요?

전쟁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무기 중 하나였던 활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발명되게 되었을까요.

단순해 보이지만, 지금도 만드는게 쉽지 않다고 들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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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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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중한대벌래33
    귀중한대벌래3323.08.30

    안녕하세요. 김찬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처음엔 돌을 손으로 던져서 잡았을 겁니다. 그리고 좀 더 멀리 던지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이 고안되었겠죠, 그중에 돌팔매 질도 있을 것이고 새총 같은 형태도 나왔을것 입니다. 그런 와중에 사정거리를 비약적으로 늘리게 되는 활이 발명되게 되었을 걸로 예상됩니다.

    한국에서의 활의 역사는 기원은 두말할 나위 없이 선사시대에 만들어집니다. 사냥과 전쟁을 위하여 활을 만들었으며 화살 자체는 사라졌으나 돌촉·쇠촉 등 화살촉을 남김으로써 당시의 활의 모양을 유추할수 있습니다. 역사시대로 들어와 활은 보다 정교하게 만들어지며 단궁과 장궁, 복합궁으로 나뉩니다. 한국의 각궁(角弓)은 단궁이자 복합궁으로 성능이 뛰어나고 사정거리가 멉니다. 고조선에서 시작된 단궁의 맥은 삼국시대를 거쳐서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럼 도움이 되셨다면 추천과 좋아요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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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활은 후기 구석기시대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구석기 시대 유적지에 뗀돌살촉과 같은 것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활은 등장한 이래 화기가 등장하기까지 인류의 주력 우너거리 무기로 오랫동안 사용, 최초에는 사냥용으로 사용된것으로 추측되며 점점 무기로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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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활과 화살은 구석기말에 근동아시아지방의 민족이 사용하기 시작하여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여러 수렵민족 간에 급속히 보급되었으며. 수렵용과 아울러 무기로서 사용되었지만 고대의 무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장 발전되지 못한 무기입니다. 신석기시대 이후 재료의 변화는 있어도 형태나 효능면에서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며

    화약의 발명과 총의 등장도 궁시의 사용을 저하시켜 현재는 운동경기용이나 취미용으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우리민족은 활과 화살을 잘 만들어 중국에서는 동이(東夷)라고 지칭 할정도로 활을 잘 사용한 민족입니다 .

    고조선의 단궁(檀弓)(나무로 만든 목궁木弓)에서 비롯된 우리나라 활은 삼국시대 각궁角弓으로 이어집니다

    활(弓)과 노(弩)는 원천적으로 다릅니다 사용법과 용도 방식이 다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같은 종류또는 쇠뇌나 석궁으로 분류하는데 이는잘못된정보 입니다 삼국지 제갈양이 남만의맹획을 포획할때 이 노를사용한기록이 등장 합니다 이 노는 명나라때 널리 개량되어 궁성수비용으로 보급되었습니다 이 노의 원리를착안 연구 개발하여 세종때 신기전으로 발전된것입니다 세종실록에도 등장합니다

    총기로 비유하여 말한다면 활은 볼트액션식의 단발 발사방식이지만 노는장치에의해 한번에 3발내지 6발 발사가 가능한 다연장 발사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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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 나라 활의 역사는 고조선의 단궁(檀弓)에서 비롯되는데, 단궁은 목궁(木弓)으로서 삼국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나는 신식무기 각궁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단궁에 관한 기록으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들 수 있는데, “예(濊)는 창[矛]을 만드니 길이가 3장(丈)이나 되어 몇 사람이 이를 들어야 한다고 하며, 또 보전(步戰)에도 능하고 낙랑단궁(樂浪檀弓)이 이 나라에서 나온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 단궁은 부여·동옥저 등 여러 나라에서 모두 사용된 활이며 삼한(三韓)에서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낙랑단궁이란 조선단궁을 말하는 것으로서, 중국과 다른 우리 고유의 활, 즉 각궁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유득공(柳得恭)의 『사군지(四郡志)』에 보면 “속(俗)에 단(檀)을 일컬어 박달(朴達)이라 하는데 박달나무로 활을 만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단궁의 궁재(弓材)가 과연 박달나무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진서(晉書)』 숙신전(肅愼傳)에 “석노(石弩)와 피골(皮骨)로 만든 갑옷이 있는데, 단궁은 3척 5촌이요 그 화살인 호시(楛矢)는 길이가 1척 8촌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단궁이 단궁(短弓)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힘(弓力)은 위력적이어서 능히 국방의 주무기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즉, 단궁의 성능을 알기 위해서는 단궁의 맥을 이은 숙신의 호시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아야 하며 그럼으로써 비로소 그 실체를 유추, 파악할 수 있다.


    중국문헌에 보면 숙신의 호시석노(楛矢石弩), 예의 단궁, 고구려의 맥궁(貊弓)에 관한 기록이 눈에 띈다. 『사기』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보면, “옛날에 무왕(武王)이 상(商)을 극(克)하고 도(道)를 구이(九夷)와 백만(百蠻)에 통하여 이에 숙신이 호시석노를 바치니 그 길이가 1척이요 지(咫)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읍루(挹婁)는 그 활의 길이가 4척이니 그 힘이 노(弩)와 같으며, 화살은 광대싸리[楛]나무를 사용하니 그 길이가 1척 8촌이며 청석(靑石)으로 화살촉을 만든다. 옛날의 숙신국은 활쏘기를 잘하여 사람을 쏘매 모두 맞고 화살촉에 독(毒)을 발랐으므로 사람에게 맞으면 모두 죽는다. 그 인구는 적으나 살고 있는 곳이 험한 산중인 데다 이웃나라 사람들이 그 활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정복하지 못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익(李瀷)이 쓴 『성호사설』에는 “숙신의 호노(楛弩)는 천하가 보배로 삼는다”고 칭찬하고 있다. 이것은 호시가 쇠를 뚫는 위력을 가졌기 때문이며 그 비결이 후세에 전수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호(楛)란 광대싸리나무를 말하며 그 주산지가 두만강구의 서수라(西水羅)였으므로 일명 서수라목이라고도 하였다. 서수라(함경북도 경흥군 노서면 서수라동)에는 진(鎭)이 있어 국경을 수비하는 군대가 상주하고 있었으며 그 주무기는 활이었다.


    활 잘 쏘기로 유명하였던 조선 태조도 이 호시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용비어천가> 27장에 “태조께서 대소명적(大哨鳴鏑)을 쏘기를 좋아하시어 대나무를 쓰지 아니하시고 광대싸리로 화살을 삼으셨다”고 하였으며, 『성호사설』에도 “우리 태조께서는 늘 대우전(大羽箭)을 쓰시어 화살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숙신의 호시는 고구려를 거쳐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져왔을 뿐 아니라 여진(女眞)이 이를 계승, 천하를 통일하는 무기로 삼았던 것이다.


    『고려사』 세가(世家) 권5에 보면 “현종 21년 여름 4월에 동여진의 만투(曼鬪) 등 60여 명이 과선(戈船) 4척과 호시(楛矢) 11만 7,600을 내헌(來獻)하다. 5월에 동여진의 봉국대장군(奉國大將軍) 소물개(蘇勿蓋) 등이 말 9필과 과선 3척 그리고 호시 5만 8,600 및 기장(器仗)을 내헌하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한편, 화살촉으로 사용되던 청석은 백두산에서 비롯되는 장백산맥에서 나던 특수한 돌이었다. 즉, 『삼국지』 위지 읍루전에 “청석으로 화살촉을 만든다”고 하였고, 『진서』 숙신전에는 “이 나라의 동북쪽에 산이 있어 돌이 나오니 그 특징이 쇠를 뚫으며 이 돌을 캘 때는 반드시 먼저 신에게 기도를 드린다”고 하였다.


    또, 오늘날 함경북도 경흥군의 서수라를 기점으로 하여 성진·종성·회령·부령 등지에서 백두산에서 나는 흑요석제(黑曜石製)의 화살촉이 출토되고 있으므로 청석이란 바로 흑요석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리한 화살촉에 독약을 발랐는데 매년 7, 8월이 독약 채취의 적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원료가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화살촉에 바른 독약은 치명적이어서 고구려를 침략한 당태종(唐太宗)의 사인이 안시성에서 맞은 화살 때문이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남아 있다.


    이상과 같이, 단궁의 맥은 고조선에서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에 새로 등장한 각궁 이후에도 여전히 쓰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각궁의 등장과 함께 단궁은 쇠퇴한 것으로 추정된다.

    각궁은 단궁과 달리 그 재료가 다르다. 즉, 각궁은 속칭 산뽕나무로 알려진 자(柘)와 아주까리씨[山蓖麻子]를 재료로 하여 다양하다. 이 두 재료는 예로부터 궁간상(弓幹桑)·궁간목(弓幹木)으로 알려져 있어 좋은 활[好弓]은 반드시 활 전체의 재료로 이를 쓰며, 보통의 활은 궁간의 속알맹이로만 쓴다고 알려져왔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각궁의 재료인 아주까리씨는 평안북도 의주·창성·삭주·영변, 황해도 서흥·수안·곡산, 경상북도 영덕에서 나며, 산뽕나무는 평안남도 운산·개천, 경상남도 남해, 강원도 강릉·삼척·울진·정선 등지에서 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궁에서 각궁으로의 이행기는 삼국시대 초로 추정되는데, 고구려의 맥궁은 분명 각궁이었으며 백제와 신라 역시 각궁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이 시대에는 쇠뇌[弩]라는 신무기, 즉 포노(砲弩)가 등장하여 이를 수레에 싣고 다니는 차노(車弩)까지 나타났다.


    그러나 단지 화살만은 남북이 서로 달라서 고구려에서는 호시, 신라와 백제에서는 죽전(竹箭)을 사용하였다. 죽전의 원료인 살대[箭竹]는 전국에서 생산되었으나, 특히 지리산의 것이 유명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그 재식(栽植)을 보호, 장려하였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한층 활의 종류가 늘어나고 있는데, 그 일부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의 군제에 경궁(梗弓)·사궁(射弓)·정노(精弩)·강노(剛弩) 등 특과병이 있으며, 활에는 동궁(彤弓)·장엄궁(莊嚴弓)·세궁(細弓)의 3종, 화살에도 세전(細箭)·유엽전(柳葉箭)·대우전(大羽箭)·편전(片箭)의 4종이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쇠로 만든 철전(鐵箭)이 나타났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에 보면 “고려 궁전(弓箭)의 제도는 그 형상이 간략하고 마치 탄궁(彈弓)과 같고, 그 몸체의 길이가 5척이며 화살은 대를 사용하지 않고 많이는 버드나무 가지[柳條]를 사용하며, 또한 짧고 작다”고 한 것으로 보아, 유전(柳箭)이 보급되어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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